원문정보
초록
영어
Ravine Catholic Communities are made in various areas of Gyeonggi-do around Seoul, and growth of religious influence is distinguished in the southern Gyeonggi areas or mountain communities near Seoul. The reason why believers resided in mountain communities near Seoul is that it was easy to go and come to Seoul and living a free religious life was possible. Surisan Kong-so where St. Choi Gyeong-hwan was as a catechist is one of mountainous ravine Catholic communities near Seoul. Hudumidong in Anyang was the region bordered on Siheung, Ansan, and Goangju, and at the same time Incheon, Bupyeong, Anyang, and Yong-in around Surisan were connected to a ridge(The Han-nam mountain range) so that believers or missionaries could use a mountain path when moving or visiting. Through the mountain path, human and regional network between Kongso and ravine Catholic Communities in Gyeonggi Province was formed to make an exchange between Seoul and the church. Believers of Surisan Kong-so made a faith community as well as a livelihood community organization to maintain their livelihood. The main crops of Surisan, tobacco was proper to mountainous soil and made a high profit, but it needed high labor. Therefore, all members of ravine Catholic Communities had to work, and for it, the faith community based on the Catechist seemed to be used as an organization for common labor. Despite the persecution in 1839, Surisan ravine Catholic Communities remained, and it served as a faith center creating many martyrs. Surisan Kong-so rebuilt after the opening of a port was developed as a position of the faith community in Anyang and its neighboring areas(Gunpo, Siheung, Ansan). However, religious influence of Surisan Kong-so weakened along with the decline of tobacco farming during Japanese ruling era after 1910. As religious influence of downtown areas in Anyang was getting increased than Surisan mountainous districts, the center of the faith community was moved. Currently, Surisan is changed into a shrine with St. Choi Gyeong-hwan’s tomb, and spreads exemplary religious life, an act of charity, and martyrdom faith.
한국어
본 논문은 수리산 공소가 서울 인근 ‘산골 교우촌’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교우촌의 형성 배경과 신앙공동체로서 실상, 변모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수리산 공소의 교회사적 의의를 정리해보았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그 이전에는 신자가 없었던 지역까지 천주교 신자들의 이주가 진행되었고, 산골로 숨어들어가 모든 삶을 천주교 신앙에 맞춰 사는 ‘산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30년대 경기도 지역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각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는데 경기 남부 지역이나 서울 인근 지역에 교세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서울에 가까운 지역, 특히 산골에 신자들이 이주했던 이유는 교회의 중심지인 서울과 교류가 쉬우면서도 한편으로 서울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1830년대 말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직접 교우촌을 방문하여 공소(公所)를 세우고 회장(會長)을 임명하였다. 이를 통해 교우촌들은 공소를 중심으로 조직화되었고 공소 회장이 선교사와 일반 신자를 중개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다. 최경환 성인이 회장으로 있던 수리산 공소 역시 서울 인근 산골 교우촌 중 하나로서 인근 지역에 신앙을 전파하는 신앙 중심지 역할을 했다. 최경환은 모범적이고 열성적인 회장이자 뛰어난 강론가로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유명했고, 자기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수리산 공소 신자들을 이끌어 나갔다. 수리산 공소가 위치한 안양 후두미동은 수리산 안쪽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시흥, 안산, 광주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동시에 수리산을 중심으로 인천·부평 지역과 안양, 용인 지역이 산등성이[한남정맥(漢南正脈)]로 연결되어 있어 신자들이 이동할 때나 선교사가 방문할 때 산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산길을 통해 경기 지역 공소․교우촌간의 인적 물적 연락망(네트워크)이 형성되어 수리산과 다른 지역 공소, 또 서울 교회와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수리산 공소의 신자들은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생업공동체 조직을 만들었다. 수리산의 주요 작물인 담배는 산골 토양에 적합하고 이윤도 높았지만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교우촌 구성원 전체의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회장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 조직이 공동 노동을 위한 조직으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최경환 회장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수리산 신앙공동체가 공동체 안팎으로 선행을 베풀고 좋은 평판을 얻게 됨으로써 수리산 인근 지역에 교우촌이 확산될 수 있었을 것이다. 1839년 박해에도 수리산 교우촌은 지속되었으며 1866년 박해에도 여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하는 등 신앙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개항 이후 재건된 수리산 공소는 안양과 그 인근 지역(군포, 시흥, 안산) 신앙공동체의 거점으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리산 공소의 교세는 1900년을 기점으로 해서 점차 줄어들었으며 담배 농사의 쇠퇴와 함께 191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안양 지역 내에서도 1930년대 이후에는 도심 지역의 교세가 수리산 산골보다 커지면서 신앙공동체의 중심지가 옮겨지게 되었다. 수리산 공소는 안양 중앙 본당(1954년 설정)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고 공소로서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대신 최경환 성인의 묘가 있는 성지로서 변모하여 최경환 회장이 보여준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자선 행위, 순교 신심을 전파하고 있다. 안양 수리산 공소(교우촌)은 박해시기는 물론 개항 이후 천주교회가 재건되는 과정에서도 공소간의 연락망(네트워크)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울 및 다른 지역의 공소와 연계를 맺으면서 안양, 군포, 시흥, 안산 등 서울 인근 산골 교우촌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최경환 성인의 모범적 신앙과 덕행이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신앙공동체 전체로 승화되었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천주교회와 신자들에게 큰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수리산 교우촌 형성의 배경
1. 1830년대 경기 지역 천주교회의 상황
2. 안양 수리산 교우촌의 입지조건
Ⅲ. 수리산 공소의 설정과 산골 교우촌의 실상
1. 공소 설정과 경기 지역 공소간 네트워크 형성
2. 수리산 산골 교우촌 - 신앙과 생업의 공동체
Ⅳ. 수리산 공소의 변화와 천주교 공동체의 확산
1. 수리산 공소의 시련과 극복
2. 수리산 공소의 재건 - 신앙공동체의 중심 거점
3. 수리산 공소의 위상 변화 - 산골에서 도심으로 신앙 중심지 이동
Ⅴ.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