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조선의 성리학은 16세기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이후 매우 심화되어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이후 기호의 여러 학자들은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은 예학(禮學)을 성리학보다 더 연구하여 사회의 질서와 명분을 구축하는데 전력하였다. 그의 문인들 역시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논쟁보다는 예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학문을 구축하였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기호의 학문을 계승한 부친 윤선거(尹宣擧)을 통해 일찍이 학문에 입도하였다. 그의 부친은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윤증은 부친과 동문수학한 유계(兪棨)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다가 장인 권시(權諰)에게도 학문을 익혔다. 특히 그는 14세 때 부친과 유계가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술할 당시에는 글 쓰는 것을 받들며 예학에 대한 모든 것을 익혔다. 그는 29세 때 송시열의 문하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익히고 토론하면서 사제의 의리가 돈독하였다. 윤증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배우면서 학문에 대한 견해가 뛰어나 세간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런데 그는 송시열과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유계의 아들 유상기(兪相基)와의 가례원류 편찬 등으로 인해 스승 및 동학과의 관계가 소원하게 되어 종국에는 결별하였다.
본 글은 윤증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추숭을 기술한 것이다. 윤증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많은 학인들과 교연하다가, 스승 및 동학과 양분되는 아픔을 가졌다. 때문에 먼저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징사(徵士)’의 측면, 그리고 후대의 평가를 양분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그 다음으로 문인의 학문 경향과 원우배향(院宇配享)을 통한 추숭(追崇)을 기술하였다.
중국어
朝鮮的性理學在16世紀李滉和李珥之後, 逐渐深化而成为全盛时期. 畿湖的諸學者繼承了李珥的學問, 金長生和金集针对禮學投入了更緻密、專力的研究来構築社會的秩序和名分. 他的門人对禮學的關心也远远大于論爭性理學并致力構築此方面的學問.
明齋的尹拯通過繼畿湖學的父亲尹宣擧, 比较早得投身於學問. 他的父親修學於金集門下. 尹拯便受學於與父亲同門修學的兪棨而習學於其丈人權諰. 特别是尹拯於十四歲时便習得了父親和兪棨共撰的家禮源流,中禮學的所有内容. 二十九歲時, 他从宋時烈那儿修習并讨论了朱子大全,学习的同时与師弟的義理变得更加敦篤了. 因尹拯修學於當代最高的學者, 對於學問的造詣显得更为出衆,从而名聲藉藉於世間. 然而他和宋時烈的懷尼是非,、与兪棨之子兪相基的家禮源流編纂等原因, 同老師、同學的關係变得疏遠而最终导致訣別.
本論文研究了對於尹拯的後代評價和追崇. 尹拯不追求出仕而致力於性理學和禮學. 他與众多學人结缘, 导致與老師及同學分道扬镳. 因此最先考察了不追求出仕的徵士生涯, 从侧面略述了後代的不同评价. 以此撰述了門人的學問傾向和院宇配享的追崇.
목차
1. 들어가는 말
2. 學問交緣과 兩分
3. 自評的 徵士와 後代의 價
4. 明齋門人과 享祀追崇
5.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