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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治內亂 以後 長州藩의 內情과 諸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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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Chōshū’(長州)s Domestic Condition and Shotai after Genchinairan

원치내란 이후 장주번의 내정과 제대

오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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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uggest a new analysis about the role of the Shotai in Chōshū’s Genchinairan(Chōshū’s civil war) by investigating the Chōshū’s real circumstance. A major reason of Chōshū’s success in the Meiji Restoration was due to the Shotai, which was essential to overcome the political disadvantages as a Tozamahan(外樣藩). Established in June. 1863, the Shotai was the primary military forces of the anti-Bakuhu movement in Chōshū.Instead of focusing in the positive roll of the Shotai, I intend to focus on the negative role of the Shotai, and this can be done by examining the hostile relations of the Shotai with Kikkawa Tsunemoto(吉川經幹), one lord of Chōshū’s branch. Especially, I intend to stress the Chōshū’s uneasy condition after Genchinairan, stemming from antagonistic relations between the Shotai and Kikkawa.The Shotai could strengthen its political position owing to Suhu(周布) party, the reformists in Chōshū, confronting Mukunashi(椋梨) party. As a consequence of it, the Shotai had few choice under the unexpected political change, like Suhu party’s downfall and Mukunashi party’s assuming power in September. 1864.The political unrest and instability after Genchinairan in Chōshū caused by hostile relation of the Shotai with Kikkawa can be a good example for the negative roll of the Shotai. Genchinairan ended by intervening of Chinseikaigai(The Peace Aseembly, 鎭靜會議派), political conflict between the Shotai and Kikkawa, who instead on the remission of the leaders of Mukunashi party.Also the Shotai defied the Chōshū government policy which preferred negotiations to armed actions against the Bakuhu, the so-called Buikyōjun policy(武備恭順論). On the other side, as the attack the Bakuhu be due, in order to deal with this Chōshū government had to restore political order after the Genchinairan and have control over the Shotai.To do so, right after the political order was restored this Chōshū government planned to Kikkawa’s coming to Yamaguchi(山口). In a leap May 1865 Kikkawa went to Yamaguchi and he announced Buikyōjun policy, and also connived the punishment of the leaders of Mukunashi party. Based on these events the Chōshū government tried to repress all objections against the Buikyōjun policy and take control of the Shotai.However considering the facts that in the next year DainiKiheitai(第2奇兵隊) deserted and attack the Bakuhu’s offices in Kurashiki(倉敷)․Ashao(淺尾), and that many of the Shotai deserted also supporting these actions,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attempts to take control of the Shotai had failed.As above seen, after the Genchinairan, Shotai was a major group that the caused political conflict inside the Chōshū. Therefore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Shotai rolled both positively and negatively.

한국어

본고는 1864년 12월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된 장주번 원치내란 이후 1866년 4월 제2기병대의 탈주까지 장주번 정치상황에서 제대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장주번의 반막운동에서 제대의 역할을 재평가해보고자 한다. 제대는 막말 장주번이 외양번이라는 정치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명치유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1863년 6월 기병 대 결성 이후 장주번 반막운동의 ‘武力基盤’이었다.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연구와 달리 장주번 반막운동에서의 제대의 역할에서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이에 내란 이후 장주번 지번의 하나인 岩國領主 吉川과의 적대감과 이에 따른 장주번의 정치적 불안을 강조함으로써 제대가 내란 이후 장주번 정치적 대립의 중심에 있었음을 밝히고자 했다.제대는 1863년 6월 기병대 성립 이후 天保연간(1830~1843) 이후 번정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던 周布派의 지원으로 번내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대는 周布派의 반대파인 椋梨派와의 정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는 장주번 내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른 제대의 정치적 선택의 폭의 축소로 이어졌다. 1864년 9월 周布派의 실각 이후 제대의 정치적 고립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1865년 3월 장주번 내란 이후 椋梨派의 처분을 둘러싼 제대와 암국영주 吉川과의 정치적 대립 및 이에 따른 장주번 내정의 불안은 이러한 제대의 한계를 보여준다. 내란 이후 椋梨派의 처분을 둘러싼 제대와 암국영주 吉川과의 정치적으로 대립으로 장주번에는 여전히 양측의 무력충돌에 따른 내란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번정부는 1865년 윤5월 吉川의 山口行과 武備恭順論 지지선언을 제대의 武備恭順論에 대한 반발을 잠재우고 제대를 번정부의 장악 아래 둘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1866년 4월 막부의 공격을 두 달 앞두고 발생한 제2기병대의 탈주와 탈주병들의 倉敷․淺尾 습격사건은 번정부의 이러한 의도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내란 이후 이러한 상황은 제대가 단순히 장주번 반막운동에서 일방적으로 번정부에 종속되어 있었던 존재라기보다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인 ‘존왕양이’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번정부와 대립․갈등하였던 존재임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막말 장주번 반막운동에서 제대의 역할이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어

この硏究の目的は元治內亂(1864. 12~1865. 3)以後の長州藩の狀況を觀察することに因って幕末長州藩の反幕運動において諸隊の役割を再評価するにある. 諸隊は幕末の長州藩が外樣藩の不利を克って明治維新に成功する原動力の一つであった. そして, すでに多數の硏究者たちはこのような側面を浮彫りしてきた. 卽ち, 諸隊は1863年6月奇兵隊の結成から明治維新まで長州藩の反幕運動において武力基盤の役割をしたと言える.しかし, 筆者は諸隊のこのような側面より否定的な側面から接近しようとする. 特に, 內亂の以後, 長州藩の狀況を中心にして岩國領主-長州藩支藩の一つ-吉川經幹との政治的な緊張關を通じて諸隊は却って長州藩政府と對立ないし緊張した存在の事を强調しようとする.1863年奇兵隊の結成当時, 長州藩には天保(1830~1843)以後藩政改革をめぐる周布派と椋梨派の政爭に展開されていた. 諸隊は兩派の政爭のなかで改革派の周布派を支持するに因って長州藩において政治的な立地を固めたが, その代わりに彼らの政治的な選擇の幅は狹くなった. 1864年の周布派の失脚以後の諸隊の政治的な孤立はいい例と言える.1865年3月, 內亂が終わったものの, 椋梨派の處分をめぐる諸隊と吉川の激しい對立とこれから發生した長州藩の內情不安は諸隊の眼界をみせる. 諸隊は內亂の武力衝突が止まった後にも椋梨派指導者の處刑を求めながら藩政府を壓迫していた. その結果, 長州藩は相変わらず, 政治的對立からの新しい內亂發生の可能性が存在していた.藩政府はこの狀況を吉川の山口行と武備恭順論への支持宣言で藩內の反對勢力を收める一方, 諸隊に對する影響力の强化を図った. しかし, 1866年4月幕府の長州藩を目前にして發生した第二奇兵隊の脫隊と脫隊兵の倉敷․淺尾襲擊事件は藩政府の試しが失敗した事を見せる. 以上のように諸隊は一方的に藩政府に從屬していたものよりは尊王攘夷と言う目的の達成の爲, 長州藩と對立或は緊張した存在が分かる. 從って諸隊は幕末長州藩の反幕運動において武力基盤の役割をしたと言えば, 內亂の後には吉川との對立とこれからの內情不安のように長州藩において政治的な對立の主体であったともいえる.

목차

Ⅰ. 머리말
 Ⅱ. 元治內亂 이후 藩政府와 諸隊
 Ⅲ. 吉川經幹의 山口行과 諸隊
 Ⅳ. 第2奇兵隊의 脫走와 藩政府의 對應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저자정보

  • 오병한 Oh Byoung-Han.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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