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정보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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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동아시아사의 일반적인 인식에 의하면 16세기 전후의 변동기부터 17․18세기는 “오늘날에까지 연결되는 국가의 지리적․민족적 틀을 만들어낸” 시기로 파악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각 나라의 특징을 지닌 제도와 관행의 성립이, 근대민족주의와는 다른 형태라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와의 대비에 있어서 자의식(自意識)의 강화를 수반하고”, ‘화이관(華夷觀)의 다원화’와도 교차하면서 이른바 뒤이어 등장하는 근대가 극복대상으로 삼았던 ‘전통사회’가 형성되었던 시대라고 이해되고 있다. 사상사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물론 이념이 포함되어 있는 사상세계에서는 반드시 실태와 상즉적(相卽的)으로 사태가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15세기까지의 명(明)을 중심으로 하는 책봉체제(冊封體制)의 융성이 실태적인 명중화주의(明中華主義)를 체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주자학적 이념으로 수용되어 간 것은 ‘동쪽 변방’의 일본에서는 오히려 17세기 전반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과 명과 청의 왕조교체의 영향도 있어서, 일찍부터 ‘일본형 화이사상’의 요소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 일본의 독특한 자타인식(自他認識)이 성립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경우 17세기 이래의 ‘조선소중화주의’의 성립도, 일본과 달리 16세기에 주자학이 정통교학으로 확립되어 있었던 사정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선의 독자적인 자타인식의 성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 조선의 각각의 자의식이 강화되어 가기 직전, 바로 16세기부터 17세기로 이행하던 시기의 하나의 ‘사건’으로서 일어난 것이 강항(姜沆)과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만남이었다. 지금까지 이 ‘사건’은 일본주자학의 안쪽으로부터, 혹은 세이카의 사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주자학 성립에 준 영향관계로서 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자타인식의 문맥에서 파악할 때 이 ‘사건’은 매우, 그리고 더욱더 흥미로운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거기에는 16세기까지 동아시아 세계의, 곧이어 각기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일본형 화이사상’과 ‘조선소중화주의’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주자학을 매개로 한 공시적(共時的)인 사상세계의 스파크와 또한 17세기 이후 큰 흔적을 남기는 ‘어긋남’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그 후 17세기 중반 명(明)과 청(淸)의 왕조 교체를 거친 후 격변하는 상호간의 자타인식의 변용을 이해하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점을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 두 사람의 타자관(他者觀)을 축으로 하면서 검토하였고, 이어서 어떻게 일본과 조선 쌍방의 멸시관이 형성되어 가는가를 전망해 보고자 하였다.
목차
2. 美抗の足跡とその日本觀
3. 藤原惺窩と明中華主義との遭遇
4. そして十七世紀へ
參考史科
국문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