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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末, 崔承祐、崔匡裕、朴仁範、崔致遠等人在唐賓貢及第, 因時值晚唐, 故歷來多言其有晚唐詩風, 今學界研究亦往往受此影響, 聚焦宾贡诸子的晚唐詩風。 但所謂“詩風”, 當指詩歌風格, 包括內容和形式上別具一格的特點。 嚴格來說, 今文學史所謂“晚唐詩風”, 當指晚唐詩歌的“風格”, 即區別於初盛中唐的詩歌特點, 是屬於晚唐這一時代的獨特標識。 晚唐社會整體陷入危機, 在苦悶的時代風氣下, 詩人創造力衰減, 詩人將關注點由國家命運轉移至個人生活, 尤其私人情感與哲學思考, 詩壇整體由注重風骨、興寄, 轉向對聲律、辭采、韻味的追求, 詩歌感情往往細膩傷感, 也更注重藝術形式的精工雕琢, 詩學史也將“晚唐詩風”歸納為偏愛形式美, 致力於藝術上的精雕細琢、鍛造工致, 而以温庭筠、李商隐等人的詞采華贍、聲情流美、細膩委曲為典範。 以此, 文學史對“晚唐詩風”的概括, 乃出於對時代新風的把握, 並非對詩壇全貌的總述。 實際的晚唐詩壇, 風氣龐雜:李頻等人學賈島的清苦, 項斯、司空圖等人學張籍的雅正, 于濆、曹鄴等學元結的簡古, 陸龜蒙學韓愈的博奧, 羅隱學白居易的通俗, 李群玉、吳融等人則學溫庭筠、李商隱的精工典麗, 各種風格不乏其人, 更有如杜荀鶴、皮日休融合多家詩風者。 若細讀賓貢諸子的傳世作品, 其詩作抒寫的內容並不都帶有明顯的晚唐特征, 在藝術形式上雖嚴守近體詩格律, 但未見形式上的精雕細刻; 且除卻李商隱等晚唐詩人的影響, 也有體現對初盛中唐唐詩的接受。 从这一角度来看, 不属文学史“晚唐诗风”典型。 諸子詩風的形成, 既源自其在晚唐的生活經歷, 又與晚唐與新羅的時代背景密切相關, 在唐末、羅末兩國衰颯時代氛圍下, 诸人诗作體現出個人有志難伸的苦悶壓抑, 这与晚唐詩衰颯的氛围相符应。
During late Silla, Korean scholars Choi Seungwoo, Choi Kwangyu, Park Inbeom, and Choe Chiwon passed the imperial examination during the late Tang period. Consequently, their poetry has been characterized as embodying a late Tang poetic style. However, in contemporary literary history, the so-called “late Tang poetic style” generally refers to poets’ shift of focus from the fate of the country to their personal lives amidst the oppressive atmosphere of the late Tang era, especially in personal emotions and philosophical thinking. A careful examination of their surviving works reveals that the content of their poetry does not consistently exhibit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he late Tang Dynasty. Although they strictly adhered to the rules of modern styles of poetry in their artistic forms, their works were not meticulously carved. From this perspective, they do not belong to the typical “late Tang poetry style” in literary history. Amidst the declining atmospheres of the late Tang and Silla dynasties, the poems of various poets reflected the depression and suppression of largely unattainable personal aspirations consistent with the declining atmosphere of late Tang poetry.
신라 말 최승우, 최광유, 박인범, 최치원 등은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했는데, 이들 빈공제자(賓貢諸子)의 입당 시기가 만당(晩唐)이었기 때문에 역대로부터 이들의 시풍은 만당 풍조였다고 이야기되어 왔다. 현재 학계도 보통 그 영향을 받아 이들의 시풍을 만당 시풍으로 논하고 있다. 그러나 ‘시풍’이란 시의 풍격으로, 내용과 형식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을 포함한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문학사에서 말하는 ‘만당 시풍’은 만당 시가의 ‘풍격’을 가리키는 것이니, 당나라 초기, 전성기, 중기와 구별되어 당나라 말기에만 속하는 시가의 특징일 것이다. 당나라 말기에 사회는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답답한 시대 풍조하에서 시인들은 창조력이 쇠퇴하여 그 관심사를 국가의 운명으로부터 개인의 삶, 특히 개인적 감정과 철학적 사상으로 돌리게 되었다. 시단 전체도 풍격과 흥취를 중시하던 데로부터 음률, 수사, 정취를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시가에 표현된 감정은 대개 섬세하고 감상적이었으며, 예술 형식의 조탁도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 시학사에서도 만당 시풍을 형식미를 선호하고 예술적으로 정밀하게 다듬는 데 힘쓴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온정균, 이상은 등의 시가 아름답고 경쾌하며, 음성과 감정이 섬세하고 완곡한 것이 그 예이다. 이로부터 문학사에서의 만당 시풍의 개괄은 시대의 새로운 기풍에 대한 파악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시단의 전체 모습에 대해 총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실제 당나라 말기 시단의 풍격은 매우 복잡했다. 이빈 등은 가도의 청빈과 슬픔을 본받았고, 항사와 사공도 등은 장적의 아정(雅正)을 본받았으며, 우분, 조업 등은 원결의 간고(簡古)를 본받았고, 육구몽이 한유의 박학과 심오, 나은이 백거이의 통속(通俗)을 본받았으며, 이군옥과 오융 등이 온정균과 이상은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본받았다. 여러 가지 풍격을 추구한 다양한 시인이 있었으며, 두순학과 피일휴처럼 여러 시파의 시풍을 융합한 이들도 있었다. 빈공제자들이 남긴 작품을 자세히 읽으면, 그들의 작품이 모두 만당 시기의 특징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작품 형식에서는 비록 근체시의 운율을 엄격히 지켰더라도 세심한 형식상의 조탁은 보이지 않으며, 이상은 등 만당 시인의 영향 외에 초당, 성당, 중당의 당시를 수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작품을 문학사상 만당 시풍의 전형에 귀속시킬 수는 없다. 빈공제자의 시풍은 만당 생활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며, 또한 만당과 신라 시대의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말과 신라말은 두 나라 모두 쇠락의 분위기에서 시인들의 작품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워 고뇌하고 억압받는 모습을 체현하고 있다. 이는 만당시의 쇠락한 분위기와 부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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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ics of Tang poetry, Silla, imperial examination, acceptance of Tang Poetry
당시학, 신라, 빈공제자, 당시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