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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주도 큰심방 김윤수의 삶을 조명하고 그의 생평을 정리하고, 1986년에 벌어진 김윤수 심방의 신굿을 정리하여 그의 유산과 제주도 큰굿의 전통을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김윤수 심방의 생평은 비교적 선명하고 공인으로서 삶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으므로 이를 정리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신촌리 신굿의 정체를 규명하고 이를 통해서 김윤수 심방의 내력을 다시금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김윤수는 심방으로서의 삶, 칠머리 영등굿 예능보유자로서의 삶, 제주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산 인물이다. 그가 본격적인 심방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여러 각도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으나, 그 가운데 그의 삶을 일으켜 세운 과정이 있었다. 삼중의 가치를 통해서 제주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김윤수는 세계적인 심방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그의 유산은 아직도 빛을 발휘하고 있다. 김윤수는 1946년 7월 9일(음력) 제주시 이도1동에서 아버지 김성년과 어머니 홍명화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윤수의 집안은 대물림으로 하는 심방 집안으로 증조부인 김정호, 조부인 김기원, 아버지인 김성년, 김윤수에 걸쳐서 모두 심방을 한 내력을 가진 집안이다. 김윤수는 큰아버지인 김천연과 큰어머니인 문옥선 등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심방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김윤수 심방은 4살 때에 모친이 재혼하게 되자 조부와 큰아버지인 김천연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으며, 6살 때에 친척집에 가는 길에 붉은 색 주명기가 날리는 곳에 가보니 육간재비가 있어서 이를 줍고 난 뒤에 신기가 생기게 되었고 그의 나이 13세부터 본격적인 심방의 길로 가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자 신병이 극심하여졌으며, 마침내 16세가 되어서 큰어머니인 문옥선을 따라다니며 굿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심방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심방 노릇을 하는데 적지 않은 차별을 겪었다. 심방새끼라는 말을 듣고 굿판을 떠나고 집을 떠나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게다가 심방 노릇을 하는 일에 고초가 더욱 컸던 것은 사회적인 몰이해라고 할 수 있다. 미신타파와 새마을운동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적 차별을 겪으면서 심방 노릇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음이 사실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가출하고 상경을 하는 등 집안을 벗어나고자 하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김윤수는 젊은 나이에 심방으로 행세하다가 수많은 모욕을 당하고 참을 수가 없어 서울로 가서 구두닦이, 아이스크림 장사 등을 해보기도 하였으나 굿을 하지 않으면 몸이 다시 심하게 아팠으므로 몇 번이나 제주로 되돌아 오곤 하는 일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김윤수는 26세에 군대를 제대하여 신촌리의 수양어머니 고군찬 문하에 들어가서 굿을 익히고 이때부터 신촌에 정착, 본격적으로 굿을 하면서 진정한 심방 노릇을 하게 되었다. 고군찬 심방의 명두 일습을 모두 이어받았다. 본격적인 조상을 모시는 심방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김윤수는 16~18세 때에, 1980년대부터 안사인 작고 때까지 안사인과 함께 굿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김윤수는 안사인에게 굿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장단이나 굿에 필요한 사설인 말명 등을 배웠다. 김윤수는 10대 후반에 큰심방 가운데 하나인 양아버지 양금석한테 제주 큰굿의 여러 가지 장단이나 춤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김윤수는 20세부터 수년간 홍명관과 함께 굿밧에 몸을 담았다. 홍명관은 김윤수의 외할아버지 홍모씨의 아들로 제주도의 당대 최고 심방 노릇을 한 인물이었다. 아울러서 김윤수는 외삼촌인 홍명관한테 북, 장고, 설쒜, 대영 등의 악기를 배웠으며, 삼석연물 장단인 느진석과 중판 및 자진석 등을 배웠다고 한다. 이 가운데 장단의 근간인 초채, 이채, 삼채 등의 북가락을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얻은 바람직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칠머리당 영등굿의 문화재 길을 걷는 행운이 주어진 것이다. 심방 노릇을 하는 고난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안사인 삼촌이나 다른 인물을 만나서 행운에 이르는 길을 마련한 셈이다. 실제적으로 김윤수는 일찍 심방 노릇을 하면서 무형문화재 전수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4년부터 칠머리당영등굿의 전수장학생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수자 과정을 거치면서 1995년 6월 1일에 제주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인 안사인 선생의 뒤를 이어 2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22년 9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This study summarizes the life of the shaman (simbang) Kim Yun-soo. It highlights the significance and cultural heritage of a shaman initiation rite, Shingut Gut, taken from the archival video 1986. After a shaman sickness, Kim Yun-soo was reborn as a true shaman under the tutelage of his godmother, the shaman Go Gun-chan. He performed a shaman initiation rite, Shingut Gut, to send the soul of the shaman Go Gun-chan to heaven when she passed away. Through this ritual, he could finallymaster the Keungut (the great shamanic ritual) fully. In this article, the legacy of Kim Yun-soo is thoroughly presented. Simbang Kim Yun-soo walked a lonely path. He entered the shamanic world after his shamanic illness and later, was acknowledged as an intangible cultural asset of Jeju Chilmeoridang Yeongdeunggut. It cannot be denied that he fully emerged in transmitting and expanding the traditional heritage of shamanic ritual (gut). The shaman Kim Yun-soo also carried out the mission of inheriting traditional gut in a modern way as an artist. He was also an enabler in managing world heritage actively. Kim Yun-soo's shaman initiation rite, Shingut Gut, filmed in 1986, played a valuable asset in Jeju Island's great ritual legacy. Although filmed by a foreign scholar, it is noteworthy that the footages fully exhibit the whole ritual and was recorded performances of many top-level shamans of the time, including the great shamans (simbang). In summary, the ritual was faithful to the tradition of a shaman initiation rite and provided a new perspective that there are no major differences between Jeju and East Asia. At the same time, unlike traditional mythologies and shamanic rituals, the shaman initiation ritual (Shingut) carries on the shaman authority and sovereign fun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