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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숙종대 후반 노소갈등이 심화되는 정국 속에서 박세채 문인이 내부적으로 노소분화를 겪었던 과정을 살펴보고, 당시 정치ㆍ학문적인 주도권을 잡았던 노론계 문인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도통의식을 형성하였던 양상을 확인하였다. 그동안 선행연구에서는 박세채와 그의 문인을 영조대 탕평파의 기원으로 평가하며 이들을 ‘탕평’의 실천자이자 붕당 간 중재자로 규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숙종대 후반 정국에서 박세채 문인이 노소갈등의 당사자가 되었던 만큼 당시 이들의 동향을 재검토하여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숙종대 후반 박세채 문인의 동향은 영조대까지 이어지는 박세채 연원을 계기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前史로서 의미가 있다. 기사ㆍ갑술환국을 기점으로 하는 박세채의 정치적 입장 변화는 그의 사후에 문인이 스승의 행적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제기하는 빌미를 낳았고 이는 박세채 문인의 노소분화로까지 이어졌다. 최석정의 『예기유편』에 대한 사문시비, 병신처분 이후 회니시비에 대한 박세채의 정론을 둘러싼 논란은 박세채 문인의 노소갈등이 불거졌던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노론의 독주체제가 공고하여지는 동향 속에서 노론계 문인은 소론계 문인에 대하여 정치적 승리를 거두며 독자적인 의리를 강화하였다. 나아가 노론계 문인은 병신처분 이후 박세채에 대한 현창사업을 진행하며 자신들의 의리를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남계예설』ㆍ『남계연보』 등의 저작을 편간하는 한편 박세채를 송시열ㆍ송준길과 함께 동시에 문묘종사하자는 건의를 올렸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노론계 문인의 현창사업은 노론의 독주체제 속에서 박세채 문인의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This article have examined the process by which Park Se-chae’s Munin divided into Noron&Soron in the late period of Sookjong’s reign. As Noron grew stronger, the Noron Munin won victories over the Soron Munin and strengthened their own ideas. The Noron Munin, who were in the lead at the time, formed their own consciousness of Neo-Confucianism orthodoxy. The efforts to highlight Park Se-chae which was led by the Noron Munin, was intended to secure the independent position of Munin of Park Se-chae in Nor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