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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紀において、東アジアの華夷秩序から華夷変態へと移行する情勢は、朝鮮と日本の学問の伝播と受容に大きな影響を及ぼす。 本稿は、18世紀に成立した、朝鮮と日本学士の筆談・唱和集を軸にしながら、さらに、「朝鮮人行列記類」、〈通信使物〉、〈唐人殺し物〉といったいわゆる「朝鮮通信使物」の文芸及び〈朝鮮軍記物〉を対象にし、朝鮮・朝鮮人の描かれ方を探ることにより、18世紀日本の対朝鮮認識の一端を垣間見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18世紀には、日本の文治100年が過ぎた時期でもあり、学問的な交歓が活発に行なわれ、多くの筆談・唱和集が成立された。ただ、その裏面には、学問を求める傾向の相違による解釈の問題、歴史認識の相違、相手国に対する不信感などが介入した、相互認識のギャップが生じつつあった。 朝鮮学士は宋代以来明によって継承されてきた宋学(程朱学、性理学)を受け継ぎ、明の継承者であるべきことを主張し、「小中華意識」による華夷秩序を維持しようとする姿勢のもとで教化、交歓を行ない、あるいは一級の文士を相手にしたときには、「白戦」の覺悟で臨んでいた。 一方、日本の学士、ことに荻生徂徠をはじめとする徂徠学派文士らは、学問的な文明化による日本型華夷秩序が保たれるようになったと主張している。 18世紀における日本の学問は、家塾、私塾、藩校などの教育機関から、多様な学問を学習した人材が輩出され、学問の流派という面においては、学問的な多様性を確保することができたと思う。 しかしながら、とはいえ、水足博泉と朝鮮学士らの詩文贈答による和の場面を文戦に変えてしまった荻生徂徠の学問的な優越意識は、その出発点が屈折されたものであり、強引な確証偏向によるものであったと言わざるをえない。


The sheer volume of visitors’ records, written conversations and poems, which were produced 4 times in the 18th century , showcase and prove how vibrant the exchanges had been between Chosun and Japan. Many collections of conversations and poems were published around this time as the rule by confucianism reached the milestone of 100 years in Japan, fuelling more cultural exchanges between the two nations. A closer look of these exchanges, however, reveals a dark side of what seemed to be harmonious in relationships, the differences of academic interest as shown in different textual interpretations as well as of historical understanding, and a sort of distrust against one another. The collapse of Ming dynasty in 1644 shattered the belief-system of Hua-Yi distinction and instead resulted in “Hua-Yi Transformation”. Taking advantage of this transitional momentum, Chosun and Japan pitted against each other to win academic hegemony. Chosun touted Neo-Confucianism, which had been fostered by Ming Dynasty after the downfall of Song Dynasty, as its national cultural platform. Chosun thought of itself as a little China, the last defender of “Huawei” world order and, therefore, its delegates condescendingly interacted with the counterparts of Japan, who needed to be enlightened through intercourse of words. On the other hand, Japanese Confucians, especially a group of scholars led by Ogu Sorai (Sorai school), believed in and promoted the excellence of its own confucianism. Their academic confidence was backed by Japanized Huawei ideology, a belief that Japan’s concerted efforts to strengthen its own Confucianism allowed Japan to lead the academic world.


18세기에 있어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1711, 1719, 1748, 1764년의 4회에 걸친 조선통신사 일본방문의 기록 및 필담 창화집을 통해서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본의 문치 100년이 지난 시기여서 양국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 많은 필담 창화집이 성립되었다. 단 양국의 선린 우호를 위한 교류의 이면에는 학문적 경향의 차이에 따른 해석상의 문제, 역사 인식의 차이, 상호 불신감 등이 작용하여 타자 인식에 대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중국 명나라의 멸망(1644년)에 따라 화이질서가 붕괴되는 「화이변태」가 발생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양국 사이에는 학문적 주도권을 다투는 경향이 빈발한다. 조선은 중국 송대 이후로 명에 의하여 계승되어온 주자학(송학, 정주학,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하고 있어, 명을 계승한다는 「소중화 의식」에 입각한 화이질서의 유지라는 자세로 교화(敎化), 교환(交歡)의 각오로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의 학사, 특히 오규 소라이를 비롯한 고문사학파 문사들은 자국 학문의 융성함을 주장하며 「문운흥륭」의 전이가 이루어져 일본에 의한 학문의 주도를 주장하는 소위 「일본형 화이의식」이 발현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소라이를 비롯한 고문사학파 문사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지만, 18세기 중엽에는 유파와 관계없이 확산되고 증폭되어 가는 것이다. 이어서 「일본형 화이의식」은 한발 더 나아가 친선 우호를 위한 외교사절인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격하시키기에 이른다.「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전설의 도입과「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전쟁」과를 결부시켜 「조공사의 방일」로 해석하는 도식이 형성되고 확산, 고착화되어가는 것이다. 18세기 일본의 학문은 가숙, 사숙, 번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하여 다양한 교과목을 학습한 인재가 배출되어, 학문의 유파라는 점에 있어서 학문적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규 소라이에 의하여 발현된 학문적 우월 의식은 그 출발점이 굴절된 것이어서, 확증편향에 의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