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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諾思計墓誌」는 2011년 한국학계에 처음 소개된 후 현존 유일의 ‘당대 발해인’ 묘지로 평가되는 묘지이다. 다만, 「낙사계묘지」에서 그 출신을 발해인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료적 근거는 오직 ‘扶餘府大首領’ 뿐인데, 이 글에서는 「낙사계묘지」의 부여부를 발해의 부여부로 파악하는 기존의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낙사계묘지」를 분석하여 낙사계의 출신과 그 투항 배경을 말갈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였다. 「낙사계묘지」의 분석 결과, 첫째 투항수령 낙사계의 인명 특징으로 볼 때 낙사계는 粟末靺鞨 출신의 당대 이민족 집단의 수장이고, 둘째 투항 이후 范陽 盧氏에 사성된 사실로 볼 때 낙사계 및 그 집단은 幽州(范陽郡)에 안치되어 幽州節度使(范陽節度使) 휘하의 蕃將과 蕃兵으로 활약하였으며, 셋째 부여부는 고구려에 부속된 속말말갈을 통할하던 욕살급 대성인 扶餘城에 설치된 安東都護府 관하의 ‘扶餘州都督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7세기 후반 고구려의 멸망 이후 부여성 지역의 속말말갈 집단은 반당 투쟁을 거치며 안동도호부 관하에서 이탈함으로써 당의 기미지배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낙사계 및 그 집단이 ‘扶餘’로 지칭되었다는 사실에서 낙사계의 출신은 고구려에 부속된 속말말갈로서 7세기 후반 고구려의 멸망 이후 靺鞨諸部의 재편 과정에서 새롭게 출현한 ‘扶餘靺鞨’이며, 부여말갈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부속된 속말말갈에서 출현한 ‘渤海靺鞨’의 정치·군사적 압박 속에 8세기 초반 발해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당에 투항하였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낙사계묘지」는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압박으로 수·당에 내부한 속말말갈의 突地稽 집단 및 烏素固 부락, 그리고 고구려에 부속된 속말말갈로서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를 건국한 大祚榮 집단(乞四比羽 포함)의 ‘渤海靺鞨’ 외에 또 다른 유형의 속말말갈 집단인 ‘扶餘靺鞨’의 자취를 증언하는 사료라는 측면에서 그 사료적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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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諾思計墓志〉,􏍘􏍖􏍗􏍗年首次被介紹到韓國學界後,被評價爲現存唯一的“唐代渤海人”墓志。但是,〈諾思計墓志〉的内容中,能够將諾思計的出身作爲渤海人的唯一史料依據只有“扶餘府大首領”。因此,本文對將〈諾思計墓志〉的“扶餘府”作爲渤海扶餘府的現有理解提出了疑問,並分析了〈諾思計墓志〉,從靺鞨史的觀點重新解釋了其出身和投降背景。 〈諾思計墓志〉的分析結果如下;第一,從投降首領諾思計的人名特徵來看,諾思計是粟末靺鞨出身的唐代外族集團的首長;第二,投降以後,從諾思計接受范陽盧氏的賜姓這一點來看,諾思計及其集團被安置在幽州(范陽郡)、在幽州節度使(范陽節度使)麾下作爲蕃將和蕃兵活躍;第三,〈諾思計墓志〉的“扶餘府”是指統轄高句麗附庸的粟末靺鞨的褥薩級大城“扶餘城”設置的安東都護府管轄下的“扶餘州都督府”,七世紀後半高句麗滅亡後,扶餘城的粟末靺鞨集團經過叛唐鬥爭後脫離安東都護府管轄,擺脫了唐的羈縻支配,過著自立的生活。 以上事實爲前提,推論諾思計的出身和其投降背景如下。從諾思計及其集團被稱爲“扶餘”的史實來看,其出身是附庸於高句麗的粟末靺鞨中,七世紀後半高句麗滅亡以後,在靺鞨諸部的再編過程中新出現的“扶餘靺鞨”。又,與扶餘靺鞨一樣,在附庸於高句麗的粟末靺鞨中出現的“渤海靺鞨"的政治、軍事的壓迫下,扶餘靺鞨的諾思計及其集團在八世紀初半拒絕編入渤海,向唐投降。 除了六世紀後半至七世紀初半,向隋唐內附的粟末靺鞨出身突地稽集團和烏素固部落,及附庸於高句麗的粟末靺鞨中,七世紀後半高句麗滅亡後建立渤海的大祚榮集團(包括乞四比羽集團)的“渤海靺鞨”之外,作爲如實地證明另一個類型的粟末靺鞨集團“扶餘靺鞨”蹤跡的史料,可以再評價〈諾思計墓志〉的史料價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