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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 필자는 근대 한민족의 디아스포라(離散) 형태로 나타난 재만 조선인(조선족)의 이주와 만주 관계에서 역사적 맥락을 더듬어 그들의 고토관념을 살펴보았다. 비록 재만 조선인들의 초기 이주는 경제적 원인에서 기인되었지만 그들의 민족적인 심성 속에서 만주에 대한 애착은 타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달리 깊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식민지 시대에 정립되기 시작한 민족사학의 선구자들의 '만주 담론'은 일반적으로 '민족고토론'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재만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일제는 '以韓制夷'의 목적에서 또한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재만 조선인들에게 '고토의식'을 주입시켰던 점을 지적했다. 만주에 대한 역사와 기억에서 '만주국'은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만주국의 건립과 그 '신국가'의 체제 속에서 활동한 재만 조선인들의 사회적 법적인 위치-'제2의 국민'-를 밝힘으로써 일제가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국가-'만주국'에 대한 지배에서 재만 조선인을 통제·이용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고찰했다. 특히 만주국에 대한 재만 조선인들의 기억은 분노와 반항-'抗日像'뿐만 아니라, 유혹과 향수-'親日像'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만주국은 재만 조선인들에게 두개 같지 않은 거울에 비추어지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는데, 즉 '抗日像'은 만주국을 '타도'와 '반동'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면, '親日像'은 만주국을 '충성'과 '효성'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주국은 14년 단명으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무너졌지만 그 역사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서 기억되고 있다. 물론 오늘날 중국 내에 거주하는 공민권을 취득하고 한개 소수민족으로 정착하고 있는 조선족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특히 만주국시기 항일투쟁사-'抗日像'의 조각에만 부심하고 있을 뿐, '親日像'은 소외시키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기억들은 민족 단결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앞서고 있는 이유 이외도 그들-'친일파'가 이미 '역사적 청산'을 받았다는 이유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만주국은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반항과 분노의 대상-'抗日像'으로 씌어진 역사로 기억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혹과 향수의 젖은 추억-'親日像'으로 얼룩진 오욕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개의 서로 다른 모습은 결코 오늘날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역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만주국과 조선인의 정체성을 조명하는데 일조가 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