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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균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한의업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1911년이 되자 신홍균은 가의(家議)를 거쳐 식솔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천성 장백현 십칠도구에 도착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1916년 소래 김중건 소래(笑來) 김중건은 민족종교 원종과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해 항일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이 십칠도구 왕가동에 부하 6명을 거느리고 찾아왔다. 1914년 봄 무렵 북간도로 망명한 김중건은 천도교에서 출교당한 뒤 새로운 민족종교 ‘원종’을 창교(宗創)했고 장백현 일대 한인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고 있었다. 농경생활과 자경단 역할의 독립군을 양성해 상생하며 살아가자는 김중건의 뜻에 ‘학행일치學行一致’의 삶이라 느낀 신홍균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일본 헌병 수색대의 장백현 왕가동 조사 과정에서 신홍균의 동생 신동균이 살해당하고 압록강에 수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항일 무장투쟁의 계기가 되어 1920년 5월 김중건과 같이 신홍균은 200여 명의 청년과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했다. 1920년 6월과 10월 봉오동과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자, 같은해 10월부터 3~4개월간 간도지역 한인(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이때 장백현 지역 원종 집무실도 불탔고 김중건마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진단 본부가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장백현 십육도구에 있던 지단(지부)은 피해를 입지 않아 이곳을 중심으로 장백현 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단, 태극단, 흥업단 등 중소규모 독립군 단체들이 연합해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김중건은 만몽조약으로 인해 중국재류금지 3년 형을 받고 고향으로 추방당했고, 단장이 사라진 대진단을 신홍균이 지켜냈다. 1921년 1월 15일, 김중건이 없는 대진단을 이끌던 신홍균과 군비총단, 태극단, 흥업단, 광복단등 장백현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소규모 독립군 단체가 모두 모여 무력투쟁 결의 대회를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1월 16일, 신동균을 무참히 살해한 일본 헌병 수색대가 있는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 시기부터 일본군 기밀 보고서에 장백현과 갑산 지역에서 정체불명의 불령선인들이 급습하고 출현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1925년 6월 11일과 7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의 봉천 군벌과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삼시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인해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들은 자경단 성격이 강해서 비적(마적, 토비세력)들로부터 지역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기도 했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 관동군이 만주를 불법 침략,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1932년 3월 1일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만주국이 수립되고, 만주국 국방군인 만주군이 편성되자, 만주지역에 거주해온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합심하여 공동의 적 일본제국을 향한 한중연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은 만주지역 중소규모 독립군의 원조를 요청했다. 대진단장 김중건 역시 지청천의 요청에 응답하며 비축해둔 물자와 부하 50여 명을 파견했다. 여기에 신홍균이 있었다. 신홍균은 1933년 3월 대진단원들을 이끌고 한국독립군에 합류했다. 사도하자, 동경성 전투 승리 후 한국독립군은 중국 연길 왕청현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일본군은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가 이끄는 1600명 규모의 간도 파견군이었고, 이들은 라 자구(羅子溝) 지역에서 연길 현 방면으로 이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자구에서 연기 현으로의 이동은 일본군이 왕청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었고, 한중연합군은 이 길목인 대전자령에서 매복을 시작했다. 폭우와 굶주림의 연속이었고 결국 준비한 식량이 다 떨어져 독립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청천, 조경한 등 한국독립군 사령관, 참모장이 사기를 북돋으려 노력했지만, 추운 날씨에 끼니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설상가상 빗물에 몸까지 젖어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신홍균은 자신의 전문지식을 발휘해 산에서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따와 빗물에 씻어 독립군들에게 먹이기 시작했고, 그 후 대전자령 전투는 한중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본 논문은 그동안 역사에 가려지고 잊힌 독립군 군의관 신홍균의 생애를 조명하고 알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자료를 토대로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고, 전문 학예사와 선배 사학과 교수분들의 공증을 거쳐 마침내 2020년 11월 17일 한의사(군의관) 신홍균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따라서 이 논문은 주지하듯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 독립유공자의 생애를 처음으로 공개하고 선양하는 목적에 있다.


Shin Hong-Gyun and his family had been in medicine for many generations as a Korean Medical Doctor (KMD). When Shin Hong-Gyun was carrying his independent movement at region 17, Jang-Baek-Hyun in 1919, his younger brother Shin Dong-Gyun was killed by Japanese military police force. This tragic incident triggered Shin Hong-Gyun to establish a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called <Dae-Jin Dan>, holding 200 young men, to serve in armed struggle against the Japanese Government with Kim Jung-Geon in May, 1920. In March 1933, Shin Hong-Gyun, as a military surgeon, led his men to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to fight a battle. Once he became a member of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he, in fact, participated in few battles: Sadohaja, Dong-Kyung-Sung, Deajeonjayeong. Daejeonjayeong was a place where the Japanese military must pass by to reach the Wangcheong area. His independence forces had to endure painful starvation and heavy rain while hiding in ambush endlessly until the Japanese military would appear. Due to its summer rainy season, rainwater overflowed into their trenches and was filled up to the waist. Even worse, the stocked food was running out; however, Japanese army did not appear for longer while. His entire team had to suffer the harsh condition- severe hunger and extreme cold. At this critical moment, Korean Medical Doctor Shin Hong-Gyun was able to distinguish, with his expertise, eatable black mushrooms that grow wild in the mountains, and used them to feed his men to overcome the starvation. This event led to the victory of the independence army at the battle of Daejeonjayeong. The purpose of the paper is to inform and highlight the forgotten history of Shin Hong-Gyun who was, both, a Korean Medical Doctor and an military surg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