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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이애숙이 가짜 공주인 ‘의순공주’라는 작호를 띠고 공녀가 되어 청으로 간 배경과 후대 인식을 살펴본 글이다. 이애숙의 아버지는 이개윤이며 어머니는 문화 류씨다. 서녀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다. 1650년(효종 1) 이애숙이 16세에 청으로 끌려간 배경에는 아버지 이개윤, 조선 국왕 효종, 청의 실질적인 통치자 도르곤의 이해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서얼 종친의 처지를 타개하려던 아버지, 정권 유지를 위해 대청관계의 평화를 바란 효종, 조선 조정의 척화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한 도르곤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혼사가 이뤄진 것이다. 의순공주 이애숙은 청에서 만 6년 동안 지내다가 1656년에 돌아왔으며 1662년에 사망하였다. 28세였다. 청으로 간 그 해에 도르곤이 사망하고, 1651년에 도르곤이 임금 자리를 넘보았다는 죄로 부관참시가 되자 의숙공주 이애숙도 적몰되어 누루하치의 손자인 박락에게 보내졌다. 1652년에 박락마자 사망하자 혼자 지내다가 청 세조의 허락으로 환국할 수 있었다. 의순공주 이애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배경에는 도르곤의 유제를 청산하기 위해 도르곤의 실정(失政)을 드러내고자 한 청 세조의 의도가 컸다. 후대에 의순공주는 여러 형태로 호출되었다. 도르곤에게 소박을 당해서 그의 부하에게 보내졌다는 이야기, 오랑캐와 혼인하느니 차라리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는 내용을 담은 ‘족두리묘’ 이야기, 청으로 가기 직전에 조선 조정에 횡포를 부린 정명수를 혼내준 일화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인의 선조가 의순공주를 청으로 보내는 일을 결단코 주도하지 않았다는 후손의 ‘변무’도 나왔다. 이처럼 각자 처한 상황이나 위치에서 의순공주의 삶을 변형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창안했으며 변명도 나온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역사의 격랑 속에 휘말린 의순공주 이애숙을 기억하는 방식이며, 패전국의 여성으로서 ‘오랑캐’에게 ‘시집’간 여성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냉대이자 역사적 평가다.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background behind Lee Ae-suk becoming a Gongnyeo with the title of "Princess Uisun" and moving to Qing and her perceptions among the later generations. Her father was Lee Gae-yun, and her mother was from the Ryu family of Munhwa. She was known to be an illegitimate daughter, but it is not true. Her move to Qing was an outcome of interests among her father, King Hyojong of Joseon, and Dorgon, Qing's practical ruler. Her return to Joseon was not an outcome of Qing Shizu's reciprocity, but his intention to abolish the system set up by Dorgon. Later generations summoned Princess Uisun in many different forms, changing her life in their memories or creating new stories according their respective circumstances. There was an "explanation in her defense" that she would never initiate of such work. The presence of Lee Ae-suk is not found in them, and it represents scars of the defeated nation and discrimination that she had to suffer as a 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