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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examines a paddle-wheel ship project imagined by epistolary exchange of two people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two protagonists are Jeong Yak-yong, alias Tasan(1762~1836), a Confucian scholar of encyclopedic knowledge with a particular interest here in civil engineering, and I Min-su(19th century), Naval commander and descendant of the Admiral I Sun-sin(1545~1598). The aim of the paddle-wheel ship project was to improve the functioning of the boats of the time as well as the daily life of the people. The material for this article is three kinds of texts written by three people. The first text is a short report by I Gyu-gyeong(1788~1856), which gives us precious information on the first model of a wheeled boat by I Min-su. The second texts are Tasan’s three responses to I Min-su in which Tasan developed several of his ideas. The third text is the proposal of I Min-su sent to his government in which the influence of Tasan is evident.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understand Tasan’s technical ideas and to deduce his social and political motivations. For the understanding of his technical ideas, several types of paddle-wheel ships are presented by architect’s drawings.


이 논문은 정약용과 이민수 사이의 편지글에서 제시된 윤선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안된 윤선이 어떤 것이며 왜 이 프로젝트가 결국은 조정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정약용과 이민수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민생을 돕고 만약의 전쟁에 대비해 기존의 노 젓는 배를 개조해 바퀴를 다는 배를 고안한다. 노 젓는 돛단배는 바람의 세기와 조수간만의 차이에 의존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 반면, 노를 바퀴로 바꾸면 자연 조건에서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노동력도 감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선 시대에 발전한 윤선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중국의 남송 때 건설된 유명한 양요의 차륜가車輪舸에서 유래하는데 주로 남인 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아이디어로 보인다. 이 논문의 주자료로 이규경, 정약용과 이민수의 글들이 동원된다. 첫째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비선윤선변증설飛船輪船辨證說』에서 이민수의 배를 1817년 여름에 보았다며 그 목격담을 자세히 적어 두었다. 이 글은 다산의 첫 편지에 언급된 이민수의 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며 다산이 제시하는 윤선의 모델들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한 글이다. 둘째로 다산이 이민수에게 보낸 세 편의 편지가 이 글의 주재료인데, 그중에서도 첫 번째 편지는 이민수가 다산의 건의하에 쓴 장계를 올릴 때 충실히 참조한 점이 분명해 보인다. 다산은 생각이 전개됨에 따라 두 번째와 세 번째 편지글에서 총 네 종류의 윤선을 고안한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프랑스 건축가들의 도면이 동원된다. 이 네 모델은 바퀴의 모양과 위치, 또 바퀴 이외의 다른 것들과 관련이 있다. 첫째 모델은 도형 8으로서 기기도설의 한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북 모양의 바퀴(고륜)로 배의 현판 밖에 설치한 것이다. 두 번째 모델은 도형 10으로서 작은 배에 얼레 모양의 바퀴를 현판 밖에 놓았다. 세 번째 모델은 첫 번째 모델의 변형으로 현판 안쪽에 십자가형의 액세서리를 설치해 밖에서 바퀴를 구르는 사람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도형 11). 네 번째 모델은 다산의 세 번째 편지글에서 보이는데, 앞의 세 모델을 고안한 후 시간이 흘러 앞의 것들 보다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반영한 것이다(도형 12). 이 최종 모델에서는 두 가지의 바퀴가 모두 쓰였고 또 돛을 다는 기둥 너머로 십자로 꺽인 모양의 액세서리를 달아서 배 안에서 바퀴를 구르는 사람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모형이다. 이 네 척의 배를 보면, 다산의 아이디어는 배의 밖에서 배의 안쪽으로 옮아가며 바퀴를 밟는 병사들의 육체적 효율성에서 정신적 두려움을 고려해서 효율성을 배로 늘리는 쪽으로 바뀐다. 마지막 텍스트는 이민수가 1817년 겨울에 조정에 올린 계이다. 다산의 편지글을 읽으면서 이민수의 편지가 부재함으로 둘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민수의 계를 읽으면 정약용의 생각들이 다수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민수가 제시한 윤선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현판 밖에 바퀴를 달았으며 바퀴의 형태는 밟아서 돌리는 바퀴이며 또 판자를 대어 병사들을 가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델은 다산이 제시한 모델에 바탕해 도안을 제시한다(도형 13). 이규경이 목격한 이민수의 비선의 바퀴와 이민수가 계에서 제시한 바퀴는 확실히 다르다. 그 다른 곳에 정약용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라우수사였던 이민수는 학자인 정약용 보다 당시의 해군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약용 보다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윤선 아이디어를 상당히 자신 있고 대담하게 소개하는 점에서 보다 세심한 학자의 면모를 갖춘 정약용과 대비된다. 정약용은 그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에서 이 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답도 받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필자는 이런 부답의 원인이 윤선의 제작과 활용에 따른 어려움도 있겠지만 윤선이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다루어져 왔던 주제라는 점에서 또 이 프로젝트가 받아들여질 경우 남인이 갖게 될 권력을 기득권을 가진 노론 중심의 관료들이 원치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