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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딜타이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 VIII권에 실린 “꿈(Traum)”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VIII권의 편집자의 주석에 따르면 “꿈” 은 딜타이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베를린대학에서 행한 “강연의 초안”이다. 수고에는 “천천히 읽어서 16분”이라는 “연필로 쓴”(전집, VIII권, 272: 이하 VIII권은 쪽수만 표함) 메모가 있다고 한다. 생일잔치의 강연이고 또 그 제목이 암시하듯 딱딱한 철학 논문이라기보다는 과거에 실제로 꾸었던 꿈을 가벼운 필치로 회상하는 글이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아서, 글은 이른바 ‘세계관론(Weltanschauungslehre)’ 또는 ‘철학의 철학(Philosophie der Philosophie)’이라 불리는 딜타이의 만년의 철학적 기획을 다루고 있다. 딜타이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적 형성물은 모두 세계관인데, 이는 다시 종교적, 예술적, 철학적 세계관으로 나뉜다. 이 세계관들의 형성 법칙과 유형별 분류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바로 세계관론이다. 이 중에서도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을 특별히 철학의 철학이라 칭하는데, 이는 “철학함 자체의 가능성, 조건, 한계”(전집, XX권, xxxviii), 그리고 실제로 철학사를 통해 형성된 철학 체계들의 유형화 가능성에 대한 메타-철학적 반성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모든 철학 체계는 철학적 세계관, 삶과 인간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정신적 노고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처럼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인간의 해결책 역시 역사적 상대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철학의 “답변”(212)은 본래는 ‘하나’여야 한다. 이 ‘하나’만이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하나’이기를 바라는 철학이 실제로는 ‘여럿’ 이다. 이 철학들은 “역사적으로 제약된 산물”(6)로서 상대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사 전체를 두고 스스로 ‘그 하나’의 답임을 자임하는 ‘여러’ 철학 체계들이 서로를 “배제하고” 끝없이 “논박하지만” 어느 하나 자신의 최종적인 “참을 증명하지 못하고”(76) “힘겨루기”(84)만을 반복하는 사태가 유지되어 왔다. 철학사 자체가 복수의 상대적인 철학 체계들의 “무정부 상태”(78)인 셈이다. 그래서 딜타이는 말한다. “철학들은 있을지언정, [그 하나의] 철학은 없다.”(전집, V권, 340) 이 무정부주의적 갈등의 해결책은 있는가? 철학이 상대주의를 이겨내고 체계들의 복수성을 극복할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체계들의 유형론, 철학사 안에 실재했던 체계들을 “그 의존과 유사”, “친화와 불화의 관련에 따라”(99) 유형으로 묶어 갈등하는 체계들의 숫자를 줄여나가 궁극적으로는 »그 ‘하나’의 철학«에로 향하는 길이다. 실제로 딜타이는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잡다한 철학 체계들을 ‘자연주의’, ‘자유의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이라는 세 개의 근본 유형으로 묶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삼원적 유형화를 가능하게 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나는 철학적 세계관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인간의 답변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세 가지의 답변만이 가능한가? 삶 자체의 양면성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이다. 삶은 “이중의 용모”(143)를 갖는다. 삶(Leben)은 한편 심적인 삶(Leben)의 “생동성”(80)과 “자유”(70)로 드러나고, 다른 한편 물리적 생명(Leben)의 “법칙”(80)과 “동형성”(143)으로 드러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삶을 사는 인간 역시 두 얼굴을 갖는다. 그는 한편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다른 한편 ‘자연의 법칙에 구속된 몸’이다. 인간의 삶의 ‘한 얼굴’, ‘다른 얼굴’, 그리고 ‘둘이 섞인 얼굴’이 바로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세 가지 답이고, 저 철학 체계의 세 근본 유형이다. 그러므로 딜타이의 철학의 철학, 철학적 체계들의 유형론, 그리고 이 유형화의 대상인 철학의 역사 전체가 실은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한 물음’, ‘자유와 자연의 관계에 대한 물음’, 정확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에서 철학은 곧 인간학이다. 딜타이는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수수께끼를 “동물의 몸과 인간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140)에 비유한다. “동물의 몸은 자연에 속하는 한에서의 인간이다. 인간의 얼굴은 자연을 넘어서는 한에서의 인간이다. 인간 그리고 그의 삶의 비밀은 이 ‘둘’이 ‘하나’의 인간이라는 데 있다. 이제 스핑크스는 인간들에게 바로 그 인간의 두 얼굴을 몸소 보여 주며 ‘인간이 답인 수수께끼’를 던지고 답변을 강요한다.”(김창래, 「빌헬름 딜타이의 ‘철학의 철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 철학탐구,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편, 38집, 2015년, 136) 자연주의자는 스핑크스의 몸만을 보고 답한다. 자유의 관념론자는 그의 얼굴만을 보고 답한다. 이 둘을 하나로 보는 자가 객관적 관념론자이다. 자연주의는 법칙적 질서로서의 자연을 유일한 현실성으로 인정하는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정신을 위한, 더욱이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자리는 없다. 영혼이란 “물리적 질서라는 거대한 텍스트에 덧붙여진 가필”(10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유형에는 프로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홉스, 흄, 포이에르바하, 콩트 등이 속한다. 이들은 스핑크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잡아먹힌다. 자유의 관념론은 -이 관점의 다른 이름은 인격성의 관념론 또는 주관적 관념론이다- “모든 자연적 질서로부터의 정신의 독립성”(111)을 인정한다. 이에 따르면 참된 현실성은 자연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의 왕국”(109)이고, 이 왕국의 유일한 법칙은 ‘영혼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 유형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피히테, 실러 등이 속한다. 이들은 모두 스핑크스의 몸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잡아먹힌다. 객관적 관념론은 앞선 두 유형의 종합이고 따라서 인간을 단지 ‘자유로운 영혼’이나 ‘자연법칙에 구속된 몸’이 아니라, “심리-물리적 삶의 통일체(Psycho-physische Lebenseinheit)”(전집, I권, 6)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온 현실성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외적 자연의 “물리적 결합 관계”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한 내면에서 체험될 수 있는 삶의 연관”(117)이 지배적이다. 인간은 그의 머리와 몸을 각기 자유로운 삶과 법칙적 자연이라는 두 세계에 나누어 담그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에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스토아 체계, 브루노, 스피노자, 괴테, 셸링, 헤겔, 쇼펜하우어,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인간을 ‘두 얼굴의 스핑크스’로 보는 딜타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