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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Bonnefoy occupe une place centrale dans le paysage de la poésie française contemporaine. Et pourtant il refusait de se donner le titre de poète, affirmant que c'est un titre que l'on ne peut donner qu'à un autre, à quelqu'un qu'on aime et qu'on admire. La question qui se pose alors est de savoir comment aborder Bonnefoy et son oeuvre. Or on trouve dans sa bibliographie une importante partie consacrée à la traduction. En effet, en plus d'avoir traduit Shakespeare, Yeats et d'autres, il a écrit un nombre conséquent d'articles sur la traduction. C'est donc par l'angle de la traduction que nous nous proposons d'aborder le projet poétique d'Yves Bonnefoy. La première chose que l'on remarque, c'est qu'il ne traduisit que des poètes. Même lorsqu'il traduit les pièces de Shakespeare, Bonnefoy envisage le texte de Shakespeare comme de la poésie. Pour lui, on devrait jouer les pièces de Shakespeare dans le noir. L'autre chose que l'on observe en regardant attentivement les traductions de Bonnefoy, c'est certaines étrangetés dans le choix de certains vocables. Sans jamais détourner le sens du poème original, Bonnefoy traduit par exemple “jelly” par “cendres”. Ces différences de vocables, Bonnefoy les reconnaît et les assume. Et comme Yvonne Legrand le remarque, quand il traduit, Bonnefoy ne traduit pas “mot à mot” mais de “poétique à poétique”. Un dialogue s'installe entre le poète traduit et le poète traducteur, dont le texte s'enrichit. Cette façon d'envisager la traduction déborde la traduction dans son sens classique et se retrouve dans les essais critiques que Bonnefoy consacra à certains poètes, écrivains ou artistes. Dès lors tous ses textes sur autrui portent la marque de sa propre poétique. Le dialogue est constant, comme le montre l'exemple du tableau d'Elsheimer, “Cérès et Stellio”. Bonnefoy dialogue avec lui dans ses textes critiques et dans plusieurs de ses poèmes. A travers ce dialogue, se précise une image, un pan entier de l'univers poétique de Bonnefoy. C'est dans ce sens également qu'il faut comprendre les cinq retraductions d'Hamlet. C'est la continuation d'un dialogue avec le poème d'un autre, mais au travers duquel Bonnefoy nourrit sa propre poésie.


이브 본느프와는 르네 샤르와 함께 프랑스 현대 시문학의 중요한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느프와가 자기 자신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 시인이라는 이름은 자기한테 스스로 붙이는 말이 아니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다른 사람한테 쓰이는 말이라고 주장 했다. 그렇다면, 본느프와가 시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본느프와를 과연 뭐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본느포와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뿐만이 아니다. 예이츠나 키츠 같은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것 외에도 번역에 관한 글을 상당수 남겼다. 따라서 본느프와의 창작관으로 접근하는 적합한 수단은 번역일거라고 본 논문은 가정하여 출발점을 둔다. 우선 본느프와가 번역에 관하여 쓴 것에 비해 직접 번역한 텍스트가 적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그가 번역한 작가들은 전부 시인인 것도 감안할 만하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극을 번역했다 하더라도 본느프와는 셰익스피어의 글쓰기는 시로 봐야한다고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시커먼 어둠속에서 낭송하듯이 연출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즉, 본느프와의 번역은 시 번역에 한정되어있으며 오로지 번역자-시인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시인을 번역할 수 있다. 시인끼리의 이러한 친근성이 있어야만 번역이 가능해진다고도 본느프와는 주장한다. 그리고 본느프와의 번역을 살펴보면 완전한 오역이 아닌데도 원문의 표현과 멀어지는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햄릿』의 한 대목에서 나온 jelly를 본느프와가 cendres(재)로 옮긴다. 문장 전체를 봤을 때 큰 오역이 아니지만, 단어 대 단어를 비교할 때는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본느프와가 이렇게 원뜻을 존중하면서 표현을 바꿀 때는 바뀐 단어나 표현은 본느프와 시에서 잘 사용되는 말들이다. 따라서 이본느 르그랑이 지적한 것처럼 본느프와의 번역은 말을 말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시학을 시학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학을 자신의 시학으로 옮기려면 최소한 아까 말한 친근성이 필요하다. 이 친근성에 의해 (번역된 시인과 번역하는 시인) 두 시인이 같은 미학적이며 시학적인 공동체에 속하는 셈이다. 이런 공동체의 개념은 본느프와의 시학과 시창작관에 중요한 요소다. 타인의 시를 번역함으로써 본느프와가 자신의 시세계를 넓힌다. 여기서 번역은 일종의 대화로 해석도 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다섯 번이나 번역한 것도 본느프와가 계속해서 셰익스피어의 글과 대화해 나아가는 뜻이다.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서 자기 시학을 같이 발전시킨다. 시인 외에도 다른 작가나 예술가에 대하여 평론을 쓸 때도 마찬가지로 본느프와가 평론하는 작가들과 대화해나간다고 봐야 한다. 자기 번역이나 평론에 자기 시학이 스며들었다하면 반대로 자기 시에 공동체에 속한 저자들의 시학이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한 좋은 예는 얼샤이머의 그림 『세레스와 스텔리오』다. 이 그림은 여러 차례 본느프와의 예술 평론과 시에 나타나서 자기 자신의 시적 세계를 그리기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마치 이 그림과 대화하면서 본느프와의 시학이 발전해나간 것처럼 보인다. 결국은 본느프와가 그리는 시학 세계는 한 인간에 의한 세계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친근한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본 논문의 제목이 제안하는 번역을 시창작으로 보고자 한 것이 번역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을 옮기는 작업 보다 이러한 대화의 공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