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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동안 강원도의 수부로 존재해 있던 원주는 강원감영이 이전되면서 그 기능을 정지당했지만 원주진위대의 설치로 군사적 측면에서 강원도의 핵심도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당하고, 군대해산으로 원주진위대가 해산되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의병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는 원주민들이 저항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저항주체의 모습은 일제시기 3·1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원주가 강원도에서 근대 이후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원주의 저항의식과 저항운동의 전통은 이후 근대도시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일제시기 원주는 일본군 헌병분대의 주둔과 일본인들의 거주로 옛 강원감영 자리를 중심으로 일본풍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원주읍을 중심으로 군사적이고, 일본풍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각 면은 농업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교육운동 등이 전개되고 일본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보통학교, 농업학교, 야학 등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의 수혜지라는 이미지도 형성되었다. 또 철도가 부설되면서 42번 국도와 함께 수도권과 경북, 강원 남부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미군과 제1군사령부 및 예하부대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면서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게 되었다. 원주는 강원도 영서남부지역의 중심도시로 교육, 문화, 경제, 군사적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이는 강원감영 설치 이후 원주가 가지고 있던 강원도의 행정, 500년 동안 강원도의 수부로 존재해 있던 원주는 강원감영이 이전되면서 그 기능을 정지당했지만 원주진위대의 설치로 군사적 측면에서 강원도의 핵심도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당하고, 군대해산으로 원주진위대가 해산되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의병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는 원주민들이 저항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저항주체의 모습은 일제시기 3·1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원주가 강원도에서 근대 이후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원주의 저항의식과 저항운동의 전통은 이후 근대도시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일제시기 원주는 일본군 헌병분대의 주둔과 일본인들의 거주로 옛 강원감영 자리를 중심으로 일본풍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원주읍을 중심으로 군사적이고, 일본풍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각 면은 농업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교육운동 등이 전개되고 일본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보통학교, 농업학교, 야학 등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의 수혜지라는 이미지도 형성되었다. 또 철도가 부설되면서 42번 국도와 함께 수도권과 경북, 강원 남부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미군과 제1군사령부 및 예하부대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면서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게 되었다. 원주는 강원도 영서남부지역의 중심도시로 교육, 문화, 경제, 군사적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이는 강원감영 설치 이후 원주가 가지고 있던 강원도의 행정, 500년 동안 강원도의 수부로 존재해 있던 원주는 강원감영이 이전되면서 그 기능을 정지당했지만 원주진위대의 설치로 군사적 측면에서 강원도의 핵심도시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당하고, 군대해산으로 원주진위대가 해산되자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의병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는 원주민들이 저항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저항주체의 모습은 일제시기 3·1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원주가 강원도에서 근대 이후 저항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원주의 저항의식과 저항운동의 전통은 이후 근대도시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일제시기 원주는 일본군 헌병분대의 주둔과 일본인들의 거주로 옛 강원감영 자리를 중심으로 일본풍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원주읍을 중심으로 군사적이고, 일본풍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각 면은 농업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노동운동, 교육운동 등이 전개되고 일본의 식민지교육정책으로 보통학교, 농업학교, 야학 등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근대교육의 수혜지라는 이미지도 형성되었다. 또 철도가 부설되면서 42번 국도와 함께 수도권과 경북, 강원 남부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미군과 제1군사령부 및 예하부대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면서 군사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게 되었다. 원주는 강원도 영서남부지역의 중심도시로 교육, 문화, 경제, 군사적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이는 강원감영 설치 이후 원주가 가지고 있던 강원도의 행정, 경제, 군사, 문화적 중심지라는 기능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군사도시라는 획일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는 도시로 성장한 것을 의미한다. 즉, 원주의 근대도시형성과정은 시가지의 형성, 교통망의 확충 등을 통해 만들어지면서 전통적인 도시 형태에서 크게 변하였지만 그 기능은 계속해서 강원도의 교육, 문화, 경제, 군사적 중심도시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원주에는 억압적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이 이어지고 있고 이는 상황에 따라 저항운동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Wonju was suspended due to the relocation of Gangwon provincial office(江原監營), but with the installation of Wonju Jinwidae(원주진위대), it was able to maintain the core city functions of Gangwon Province from the military point of view. However, it was the center of the resistance movement as the Wonju Jinwidae(원주진위대) were disbanded and Wonju Righteous Army(원주의병) got up violently. The resistance of Wonju and the tradition of resistance movement influenced the growth of the modern city. Won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as a military, Japanese-style urban image centering on the city area, and the surrounding area was an image of agriculture. However, the labor movement and the educational movement took place, and as the colonial education policy of Japan was established, the elementary school, the agricultural school, the night school, etc. were established, and the image of being the beneficiary of the modern education was formed. In addition, railroad and roads have been added and the image of the center of traffic has been added, and it has grown into a modern city. During the Korean War, however, most of the city was destroyed, and the city was rebuilt by the US Army and the Korea Army, leaving a strong image of a military city. However, the traditional city location of Wonju is making Wonju the center of education, culture, economy and military in southern Gangwon Provi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