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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소설에서 공간은 서사의 지리적 배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소설의 주제를 구체화시키고 작품에 고유한 개성을 부여하는 등의 여러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들 역시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문학작품과 철학이론을 통해서 보부아르가 일관되게 천착해 온 상호주체성이라는 개념을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피뤼스와 시네아스Pyrrhus et Cinéas』(1944)와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Pour une morale de l'ambiguïté』(1947)라는 두 권의 저서를 통해 그녀의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바 있다. 애매성을 인간 존재의 근본적 특성으로 전제하는 그녀의 사상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적대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보부아르는 주체와 동등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에 주목한다. 주체와 타자 간의 협동과 연대의 가능성을 전제로, 상호주체성을 추구하는 보부아르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의 존재론적인 실존주의와 대별되는 윤리적인 실존주의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소설 속에 재현된 장소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보부아르의 이러한 철학적 성찰이 어떻게 소설적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부아르의 소설 속에는 폐쇄적인 ‘자아의 공간’과 적대적인 ‘타자의 공간’이 존재한다. 양립할 수 없는 이 두 공간을 매개해주는 것은 바로 ‘여행’과 ‘걷기’ 행위다. 보부아르에게 애매성이란 의식이면서 육체이고, 초월성이면서 내재성일 뿐 아니라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다. 애매성에 기반한 인간 존재의 의미는 결코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변모해 나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아의 공간과 타자의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과 ‘걷기’가 애매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하는 행위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보부아르의 소설 속에 재현된 공간들과 실천적 행위로서의 여행과 걷기의 의미를 분석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보부아르의 소설적 글쓰기와 철학적 성찰 간의 유기성에 주목하고 나아가 보부아르의 소설쓰기 작업이 상호주체성에 입각한 새로운 자아 찾기의 여정임을 밝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