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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고고학자 후지타 료사쿠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후지타의 연구와 활동이 식민사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후지타의 조선고고학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 본고에서는 후지타의 논문집 『조선고고학연구』를 중심으로 그의 조선 인식과 변화를 살펴보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 및 후지타 개인의 상황에서 그 원인을 알아보고자 했다. 후지타는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을 심의하는 조선고적연구회의 위원이었으며, 그 실무를 담당하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주임이자 조선고적연구회의 간사로 활동했다. 한편으로는 경성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어 조선사는 물론 고고학을 강의했다. 후지타는 일제강점기 식민 권력의 지배 담론 생산을 위한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따라서 지배 권력인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후지타의 『조선고고학연구』에는 유적 및 유물을 다룬 원고 7편, 조선고고학 개설 2편이 실려 있다. 개별 유적 및 유물을 다룬 원고들은 후지타의 조선고고학 인식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개설 2편은 각각 1934년과 1942년에 발표되었다. 검토 결과 1934년의 개설에서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강조하는 모습이 보이는 반면, 1942년의 개설에서는 만주와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 변화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만주국의 건국으로 인한 필드의 확장, 만주국의 건국과 함께 주목된 만선연구의 영향, 후지타의 업무와 조선총독부의 밀접한 관계, 1930년대 이후 경성제국대학의 만몽 연구에 대한 관심이다. 이와 같은 검토를 통해 후지타의 조선 인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처지에 따라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日帝強占期の考古学者、藤田亮策に関連した従来の研究では、藤田の研究と活動が植民史観と密接な関係にあることが指摘された。しかし、藤田の朝鮮考古学を見る視点の変化については、相対的に関心が足りなかった。本稿では、藤田の論文集『朝鮮考古学研究』を中心に、彼の朝鮮考古学認識と変化を見て、当時の時代的背景と藤田個人の状況で、その原因を調べることにした。 藤田は朝鮮古跡調査事業を審議する朝鮮古跡研究会の委員であり、その実務を担当する朝鮮総督府博物館の主任であり、朝鮮古跡研究会の幹事として活動した。一方では、京城帝国大学の教授として朝鮮史はもちろん、考古学を講義した。藤田は日帝強占期の植民地権力の支配談論生産のための業務で重要な役割を引き受けたし、従がって支配権力である朝鮮総督府と密接な関係にあったことを考えることができる。 藤田の『朝鮮考古学研究』には、遺跡と遺物を扱った原稿7編と共に、朝鮮考古学開設2編が載っている。個々の遺跡と遺物を扱った原稿らは藤田の朝鮮考古学認識を裏付ける役割をした。開設2編は各々1934年と1942年に発表された。検討結果1934年の開設は、日本と朝鮮の関係を強調している姿が見えるのに対し、1942年の開設は、朝鮮と満州の関係に注目している。 藤田の認識の変化の原因は、次のように推定して見ることができる。つまり、満州国の建国に起因するフィールドの拡張、満州国の建国と共に注目された満鮮史觀の影響と、藤田の業務と朝鮮総督府の密接な関係、1930年代以降、京城帝国大学の満蒙研究への関心を考えてみることができる。このような検討を通じて藤田の朝鮮考古学認識が固定されていないし、時代的状況と個人的立場に基づいて変化し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