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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명・청 교체라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변화 속에서 조선이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하려 했는지, 1636년의 병자통신사 파견 경위를 인조대의 일본에 대한 인식과 국정운영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한 것으로, ‘통신사 외교’의 정책사적 의미를 파악해 보고자 한 것이다. 검토 결과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이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던 1636(인조 14)년은 후금의 ‘칭제’ 등, 교린문서식에 어긋난 외교문서를 조선이 2번이나 퇴각함으로써 후금과는 사실상 외교관계가 파탄이 났다. 언제 후금이 공격해 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인조 대에는 병사와 군량을 조달할 수 있도록 비상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명으로부터는 후금의 공격에 대한 공동 대응 및 무기 구입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야기되어 남변의 방어에 군사・안보 비용을 새로 투입할 경우 재정은 물론 왕권의 유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둘째, 따라서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는 1636년 통신사 파견을 결정함으로써 우호 유지라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는데, 그 배경으로는 도쿠가와(德川) 막부 정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었다. 국서개작사건(1631~1635년)에 대한 도쿠가와 막부의 판결로 대마번주 소(宗)씨는 온존되었지만 막부의 지시로 1635년 세견선 파견이 중지되자 조선에는 1635년 12월까지 일본에 대한 정보의 공백 상태가 이어졌다. 정보의 공백은 도쿠가와 막부의 병력 동원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국왕 인조와 신료들은 논의 끝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부터 이에미츠(家光)에 이르기까지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적 안정을, 참근교대(參勤交代) 등, 다이묘(大名)의 군사력 억제책에 기반을 둔 것으로 인식하여 조선에 대해 병력 동원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럴 경우 남쪽 변경의 방어에 새로운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었기에 최종적으로 일본의 통신사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셋째, 인조대의 국정운영 비용으로 볼 때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우호를 유지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란 예물 비용 정도로 해결할 수 있었다. 예물 준비에 드는 비용은 후금과의 긴장 고조 및 명과의 외교관계 유지에 소요되는 외교・안보 비용과 비교할 경우,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저렴한 수준으로서 재정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1636년의 통신사 파견 결정은 인조대의 도쿠가와 막부 정권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재정절감 차원에서 내린 정책적 판단으로, 당시 신료들은 이를 ‘權時之策’(변통, 임기응변)이라 칭했는데, 국교회복 직후 선조와 광해군이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할 당시 국내외적으로 명분 찾기에 비중을 두었던 것에 비한다면 실리를 추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넷째, 1636년의 통신사 파견을 통해서 본 당시의 대일본전략이란 구체적으로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조선→대마번주 소(宗)씨→도쿠가와 막부’라는 교섭라인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서개작사건 이후 ‘이정암 윤번승제’의 실시를 계기로 대조선외교에 있어서 도쿠가와 막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은 국서개작사건에 대한 막부의 조치로 만약의 경우 대마번주 교체까지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서개작사건 이후 대마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온존된 이상, 도쿠가와 막부가 그의 대조선 교섭력을 시험하기 위해 조선에 통신사 파견 요청을 지시한 것이라면, 대마번주의 외교력을 막부에 각인시키는 것이 조선으로서는 새로운 부담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바람직하였다. 따라서 1636년 통신사를 파견하기 이전 강정교섭에서도 대마번주의 입장을 고려하여 거의 대부분 요구를 수용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통신사의 에도(江戶) 체류시 쇼군 이에미츠(家光)가 소 요시나리를 통해 강정 교섭에서도 없었던 ‘닛코산(日光山) 유람’을 요청해 왔을 때 정사 임광이 이를 수락했던 것도 쇼군에게 소 요시나리의 교섭력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다섯째, 인조대의 ‘조선→대마번주 소(宗)씨→도쿠가와 막부’ 루트 유지 전략을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설사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대마번주 소(宗)씨라면 통제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이는 기본적으로 19세기말 메이지(明治) 신정권의 수립 이후 조일통교 체제의 재편 때까지 유지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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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論文は、明淸交替という東アジア国際情勢の変動のなかで朝鮮 が日本との関係をどのように構築しようとしたのかを、1636年の‘丙子 通信使’(寬永信使)の派遣經緯をテーマに、仁祖代の日本に対する認識 や国政運營費用という観点から検討したものであり、また‘通信使外 交’の政策史的な意味合いを追求してみたものである。 検討の結果、得られた結論は次のようである。 第一に、朝鮮が‘通信使’という名称で日本に使節を派遣した1636(仁 祖14、寬永13)年は、後金の‘称皇帝’など、交隣文書様式に違える 外交文書を朝鮮が二度も退却することとなり、事実上、後金とは外交 関係が破綻を向かえる時期であった。後金がいつ攻擊してきてもおか しくない、戦争直前の状況であり、仁祖の代にはいつでも兵士と軍糧 を調達できるように非常政局を運営していた。また、明からは後金の 攻撃に対する共同対応や武器購入の圧迫をも受けていた。もしも、こ のような状況のなかで日本との間に軍事的な緊張が惹起され、南辺を 防御するために新しい軍事安保費用を投入することとなる場合、財 政はいうまでもなく、王権の維持すらも難しい時代状況であった。 第二に、したがって朝鮮は1636年における日本側の通信使の派遣要 請に対しては、議論の結果、一ヶ月という短時間に派遣を決めること になる。このように特段の決定を下すようになった背景としては、ま ず朝鮮の德川政権に対する認識が挙げられる。‘国書改作事件’(柳川一件、1631~1635)の判決後、幕府の指示によって1635年分の歲遣船派遣 が中止されると、朝鮮には1635年の12月まで日本に対する情報の空白 状態が続く。情報の空白は朝鮮に徳川幕府の兵力動員に対する不安感 をいだかせることとなる。国王の仁祖と臣僚たちは論議のすえ、徳川 幕府の政治的な安定が、参勤交代など、德川家康から家光の三代にか けて大名の軍事力を抑制するための政策から得られたものと認識し、 朝鮮に対する兵力動員の可能性はないと判断した。そうした場合、朝 鮮としては南辺を防禦するために新しい安保費用をかける必要がなく なるため、最終的に日本の通信使派遣要請を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た のである。 第三に、仁祖代の國政運営費用からみるならば、日本に通信使を派 遣して友好関係を維持するに必要とされる経費とは礼物程度のもので 済んだ。礼物の用意にかかる費用とは、後金との高まる緊張、また明 との関係維持にかかる外交安保費用に比べれば、比較にならないほ どの低廉な水準であり、財政が節減できた。要するに、1636年の通信 使派遣決定とは徳川政権に対する正確な理解や財政節減を意図した政 策的な判断であり、当時の臣僚たちはこの決断を‘権時之策’(変通、 あるいは臨機応変)と名付けた。国交回復の直後、国王の宣祖や光海 君が'回答兼刷還使を派遣する際、国内外的に名分探しに比重をおい たことに比べれば、実利を求めた結果であるといえる。 第四に、1636年の通信使派遣を通してみた仁祖代の対日本戦略と は、従来同様、‘朝鮮→対馬藩主の宗氏→徳川幕府’という交涉ルート を確固たるものにすることであった。朝鮮としは、‘柳川一件’以後、 ‘以酊庵輪番僧制’を契機に日本の対朝鮮外交において徳川幕府の影 響力が大きくなることを防ぐ必要があった。また朝鮮は‘柳川一件’に 対する幕府の措置として、対馬藩主(宗氏)の交替(改易)までをも 想定していた。朝鮮にしてみれば、徳川幕府が宗義成の対朝鮮交涉力 を試すために通信使派遣の要請を指示したものならば、対馬藩主の外 交能力を幕府にアピールさせるのが、新しい相手に対する負担が生じ ないという点で一番望ましい選択であった。したがって、通信使派遣 の講定交涉においても、対馬藩主に対する配慮から、儀礼と関わる対 馬藩の要求をほとんど受け入れた。通信使の江戸滞留中、将軍の家光 が宗義成を通して講定段階では提起されていなかった‘日光山遊覽’ を要請してきたとき、正使の林絖がこれに応じたのも、宗義成の交涉 能力を幕府にアピールさせるためであった。 第五に、仁祖代における‘朝鮮→対馬藩主(宗氏)→徳川幕府’ ルート守護戦略は、朝鮮にしてみれば、日本との関係において、たと え予想もつかない問題が発生するとしても、対馬藩の宗氏ならば、ど んな場合でも統制できるとおもっていたからであり、このような戦略 は、19世紀末、明治新政府の朝日通交体制の再編まで基本的に維持さ れたと考えられ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