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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조상기의 내용을 통해서 ‘노사나불’이라는 존명을 알 수 있는 예로 통일신라시대 화엄계 불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에 대한 연구는 조상기의 내용과 양식적인 특징을 분석하여 제작시기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조상기에서 ‘노사나불’임을 밝히고 있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상처럼 당시 유행했던 智拳印 도상이 아니라 施無畏․與願印을 결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또 조상기 중에 국왕이 발원했으며, 고승 決言이 불사에 참여했다는 내용을 볼 때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파악된다. 그 렇지만 불상의 제작수법은 매우 조잡해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성주체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주로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 예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도상적인 의의와 조성배경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9세기 후반, 10세기 전반, 고려전기 등 조성시기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시된 바 있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상호, 착의법, 대의의 표현방식 등을 재검토해보면 실상사 철조불상이나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상 등 신라하대 불상양식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런 양식특징과 조상기의 내용,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인용된 창건연기를 결부시켜보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삼화사가 창건되는 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三和寺古今事蹟』, 『頭陀山三和寺事蹟』, 『藥師殿重創記』, 『陟州誌』에 전하는 삼화사 창건연기 중에는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이 三身佛 중에 1구일 가능성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있다. 물론 창건연기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서역에서 온 약사불 삼형제를 철불로 조성했다는 것이나 팔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은 각 문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삼화사에서 중요하게 신앙되던 특정한 불상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창건연기에서 거론한 불상과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철불이며, 손이 훼손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창건연기에는 철불의 손을 석탑에 넣어두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삼화사 삼층석탑에서 철제조각 6점이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철제조각은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파편으로 추정된다고 조사되었다. 따라서 창건연기의 약사불 삼형제 중에 한 구가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宣祖10년(1577)에 삼척군수 金孝元이 삼화사를 방문하였을 때 철불 2구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신라하대에 홍천 물걸리사지, 금강산 장안사, 오대산 월정사에 삼신불상이 봉안되었다고 추정되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삼화사에 삼신불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상기가 다른 조상기와 합쳐지면 그 내용이 완전하게 해석될 것이라는 견해를 참고하더라도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원래 삼신불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반신이 파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배나 대좌도 전하지 않아서 原狀을 알 수 없는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도상을 복원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예로 中國 龍門石窟 大盧舍那像龕의 노사나불상과 日本 奈良 東大寺 大佛殿의 노사나불상을 꼽을 수 있다. 龍門石窟 노사나불상과 東大寺 노사나불상도 手印을 알 수 없지만, 잔존하는 손의 위치나 방향 등을 볼 때 시무외․여원인을 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시무외․여원인 노사나불상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조성되던 도상이므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공유하던 노사나불상의 도상을 따르고 있다고 파악된다. 그리고 龍門石窟 노사나불상의 조성에 의상과 교유하던 法藏이 교의적인 배경을 제공하였고, 東大寺 노사나불상은 審祥을 비롯한 신라인들의 사상적, 경제적, 기술적인 지원 아래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늦어도 8세기 전반에는 신라에서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상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상기의 내용에 따르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은 국왕이 발원하고 고승인 결언이 불사에 참여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치졸한 제작수법을 볼 때 실제로 그렇다고 믿기 어렵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사나불상을 조성했던 숭복사 重創에 관한 기록을 보면, 국왕을 대신하여 왕족이나 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불사를 총괄하는데 비해서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의 조상기에는 6두품에서 4두품에 속하는 官匠인 ‘伯士’라는 칭호만 나타날 뿐이다. 용봉사 마애불입상도 ‘伯士’인 元烏가 조성했다지만 사실은 지방의 현령이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칭호를 도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지방의 불교도들이 발원한 선림원 범종의 조상기에도 고승 順應이 ‘上和尙’으로 불사에 참여했다고 윤색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볼 때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상도 불사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홍보를 위해서 국왕과 결언을 내세웠다고 생각된다.


Considering pattern characteristics and records about foundation,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are estimated to have been formed in the late 9th century when the temples were built.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Samhwasa-temples’ foundation, their iron Locana Buddha images are assumed to be one of the three Bhaisajyaguru Buddha brothers from the countries bordering on Western China. Though it is not hard to believe the records, the points that they are iron Buddha and their hands are damaged correspond to those of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Also,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foundation, the iron Buddha’s hands are stored in stone pagoda, and in fact, six iron pieces were excavated from Samhwasa-temples’ three-storied stone pagoda. These iron pieces are supposed to be those of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Referring to the fact that in the same period, Tri-kaya Buddha was built in nearby area or that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inscription combined with another inscription is a complete form, we can assume that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were originally built as Tri-kaya Buddha. The examples referable to restore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Iconographic may be Locana Buddha images from Daenosanasanggam(大盧舍那像龕) in Longmen Grottoes temples(龍門石窟), China and also Locana Buddha images from Daebul-jeon(大佛殿) of Dongdae-temple(東大寺) in Nara, Japan. Because Abhay and Varada Mudra’s Locana Buddha images were Iconographic built in China and Japan, too, we can assume that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imitated the Iconographic of Locana Buddha images shared by the three states in East Asia. Also, considering these statues of Buddha, we can see that at least from the early 8th century, Abhay and Varada Mudra’s Locana Buddha images were built in Silla. According to the contents of the inscription,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are said to have been built by the king’s wishes and famous Buddhist monk, Gyeoleon’s joining in the temple. However, it is still hard to believe that in consideration of their unsophisticated methods applied. Referring to the records about rebuilding of Sungbok-temple or the inscription of Carved buddha images in Yongbong-temple, we can assume that when building Samhwasa-temples’ iron Locana Buddha images, they may have used the king and Gyeoleon(決言)’s names deceitfully to justify the temple clearly and publiciz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