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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통신사에 관해 논문을 쓸 때, 종가문서에는 倭館이라고 하는 용어가 없고 和館 뿐이기에, 和館이라고 쓰면 언제나 倭館이 아니냐며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조선 측 사료를 근거로 할 때는 倭館이라고 하고, 일본 측 사료를 근거로 할 때는 和館이라고 기술하기로 한다고 했다. 倭館과 和館이라고 하는 말은 어떠한 차이가 있고, 또 종가문서에서는 왜 和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인가?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소장 제1기 『分類紀事大綱』내용을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倭館과 和館이라는 용어가 같이 표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 倭자가 붙는 여러 한자어와 和자가 붙는 용어가 동시에 보인다. 그러나 제2기 『分類紀事大綱』속의 일본어로 이루어진 문장 속에는 和館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 和자가 붙는 말은 있으나 倭館이나 倭가 붙은 말은 하나도 없다. 제1기 『分類紀事大綱』전부 43책 중 倭와 和의 사용례를 확인하여, 제1차 사료인 每日記도 참조하여 정리하면 1678년을 경계로 그 보다 전에는 倭館과 和館, 즉 倭와 和가 혼용되어 있었음에 반해, 그 이후로는 和館이나 和가 붙는 한자어가 쓰이는 것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명확하다. 對馬藩이 倭라고 하는 용어를 피해 왜 和로 했는가 하는 경위가 적힌 사료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나 시기적으로 후세에 해당되지만 申維翰과 雨森芳洲의 倭賊, 蠻酋, 唐人에 대한 논쟁이 펼쳐진 일이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이 논쟁을 보면 倭라고 하는 말의 뉘앙스, 또는 唐人이라고 하는 말의 뉘앙스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음은 확실하다. 倭館이나 倭라고 하는 한자가 붙은 용어를 대마번이 작성한 문서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1678년의 이관 이후로 그 거주구역이 宴饗門・無常門・守門의 안쪽으로, 宴大廳・粛拜所 등이 있는 지역과 분리되어져 있었다.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守門의 안쪽이 館內이고, 그 바깥쪽이 館外였기 때문에 館內만을 가리켜 和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측은 이러한 사실에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對馬藩은 倭라고 하는 문자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고려하였기에 藩內의 文書에 倭라고 하는 글자를 사용하는 자기모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天和2年通信使に関する論を書く時に, 宗家文書に倭館という用語がなく, 和館のみであるので, 和館と書くと, いつも倭館ではないかと指摘を受けた。そこで, 朝鮮側史料による時は倭館とし, 宗家文書による時は和館と記述することにするとした。倭館と和館という用語は, どういう違いがあるのか, また, 宗家文書では何故和館としているのか。日本国立国会圖書館に所蔵されている第1期『分類紀事大綱』の內容をつぶさに確認すると, そこには倭館と和館という用語が共に表記されていることが分かった。又, 倭という漢字を含む用語, 和という漢字を含む用語が共に見える。しかし, 第2期『分類紀事大綱』の日本語の文章には, 和館しか見えない。また, 和が附く用語はあっても, 倭館や倭が附いた用語は一つもない。第1期『分類紀事大綱』全43冊で, 倭と和の使用例を確認し, 一次史料である毎日記で, 原表記を確認できるものはできる限り確認し, 全体像を整理すると, 1678年を境として, それより前は倭館と和館, 倭と和を混用していたのに, 以降は和館や和が附く漢字語に統一されていくという実態が明らかとなる。 對馬藩が倭という文字を避け, 和にしようとした経緯について直接言及した史料は未だ確認できないが, 後世でのことだが, 申維翰と雨森芳洲との間の倭賊, 蠻酋, 唐人をめぐる論争から推察されるような, 倭という言葉の持つニュアンス, また唐人という言葉の持つニュアンスが関係していることは明らかである。倭館や倭という漢字を持つ用語を, 藩內の文書に書かないようになったのは, 1678年の移館後, その居住区域が, 宴饗門, 無常門, 守門の內側で, 宴大廳, 粛拜所などがある地域と分離されており, 通常出入りする守門の內側が館內で, その外側が館外であることから, 対馬の人々が居住していた館內に限定して和館と称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朝鮮側は, これにあえて異を唱えなかったようである。對馬藩は, 倭という文字の持つ響きを承知しながら, 藩內の文書に倭の字を書くという自己矛盾から解放された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