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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 언어상황에서 “朝鮮”은 古朝鮮에 대한 專稱 이외에도, 많은 경우 古朝鮮의 故地에서 흥기한 高句麗를 비유하며 지칭하거나, 때로는 遼東 지역을 가리키거나, 심지어 安祿山 등 河朔藩鎭을 은연 중에 가리키는 등 그 함의가 풍부하다. 儀鳳年間(677)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 高藏이 처음으로 朝鮮郡王에 책봉되었고, 그 후 垂拱年間(686) 이 爵位는 高藏의 손자 高寶元에게 전해졌다. 史籍과 墓誌에 출현하는 “朝鮮王”은 바로 “朝鮮郡王”의 약칭으로, “朝鮮”의 郡望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朝鮮郡王”은 唐朝의 “朝鮮”에 대한 歷史想像이 혼입되었다. 朝鮮의 함의는 원래 本義(古朝鮮)에서 얻었지만, 唐朝 皇帝가 東夷君長을 冊封했던 다른 郡王號와의 비교를 통해, 朝鮮郡王의 爵號는 高句麗가 統領했던 요동지역 및 高句麗가 이미 “外臣” 심지어 “不臣敵國”에서 “內臣之蕃”으로 바뀌었다는 정치적 함의를 지녔음이 드러난다. 아울러 高藏 및 高寶元이 능히 高句麗 遺民을 安撫하고 遼東의 정세를 안정시키길 기대하는 등의 복잡한 고려도 있었다. 開元 3年(715) 後突厥 默啜可汗의 사위 “高麗王莫離支” 高文簡이 무리를 이끌고 대거 唐朝로 降附한 후 河南으로 內遷하였다. 唐朝가 이 일을 크게 선전한 배경에는 遼東을 포함한 在內의 北方邊地의 정세를 안정시키려는 전략적인 고려도 있었다. 9년 후(724) 唐朝에서 기본적으로 遼東ㆍ新羅ㆍ渤海國 등의 문제, 특히 高句麗의 問題가 해결된 후, “高麗朝鮮王”은 상징적으로 內蕃의 우두머리로서 帝國의 封禪大典에 참여하는 것에 置되었다. 바로 乾封元年 高句麗 太子가 外臣으로서 封禪大典에 참가했던 기록이 이때 처음으로 완전히 改寫되었다. 史籍에는 建中年間(781)에 李惟岳이 “襲高麗朝鮮郡王”했다는 기록이 출현했는데, 唐代人들이 “偏師破朝鮮于束鹿”로 기록하여 朱韜ㆍ張孝忠가 束鹿之戰에서 李惟岳을 격파했던 사건을 묘사했음이 확실하므로, 이 기록을 단연코 부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李惟岳의 父親의 官爵 및 母系에 대한 분석을 통해, 李惟岳의 高麗朝鮮郡王의 爵號가 아마도 그 母系 谷氏 일가, 즉 安史의 亂에서 軍功으로써 幽州大將을 담임했던 谷崇義에서 유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唐朝는 677년 처음으로 高句麗의 마지막 왕을 朝鮮郡王에 책봉하고, 686년 다시 高寶元을 朝鮮郡王에 책봉하였다. 당시 新羅(安勝), 突厥(高文簡), 渤海(大欽茂)에도 高麗(高句麗)가 爵號로 존재했거나 혹은 그 法統의 기치로 이용되었다. 武周 698년 高寶元은 忠誠國王으로 進封되었다. 715년 “高麗王莫離支” 高文簡이 突厥에서 唐으로 歸附하자 “遼西郡王”에 受封되었고, 이후 突厥ㆍ新羅ㆍ渤海의 “高麗王”의 흔적은 사라졌다. 724년 “高麗朝鮮王”과 “百濟帶方王”은 內臣之蕃으로 병렬되었고, 突厥ㆍ新羅ㆍ渤海 등의 국가는 外臣朝獻之國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唐朝의 國內에서 책봉되었던 高麗王, 朝鮮郡王이 합류되어 결국 高句麗의 “內蕃化”가 완성되었음을 설명한다. 781년 “高麗朝鮮郡王”은 심지어 安東 지역이 아닌 河朔 蕃將의 면모로 재차 홀연히 바뀌어진 이후 史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