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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정도전과 권근이 성리학이라는 동일한 바탕 위 에서 그들의 철학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정도전의 유학사상과 권근의 유학사상은 매우 이질적인 바탕 위에 서 있다. 요컨대 정도전은 마음과 본성을 확연히 구분하여 마음을 기로 보는데 권근은 본성을 마음의 핵심요소로 보고 마음을 이와 기 의 합으로 기술한다. ‘마음은 모두 기이다’는 명제와 ‘마음의 어떤 요소는 기가 아니다’ 는 명제는 모순관계로 이 중 하나가 성리학의 핵심명제라면 다른 하나는 성리학의 명 제일 수 없다.마음을 기로 본다는 것은 선한 행위의 근거를 마음 밖에 두는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선한 행위의 근거를‘마음에서’찾아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주장 이다.정도전에 의하면,‘마음으로’ 이치를 탐구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행위규범을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규범을 파악해서 이것을 준수할 때 인간의 윤리적 삶이 담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정도전은 바라본다. 이러한 윤리적 태도는‘바뀔 수 없는 당연지칙’(當然之則而不可易)이라는 표현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이때의 당연지칙은,마치 물이 적절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규제하는 강 둑과 같은 행위규범을 의미한다. 권근은 마음의 지각작용을 이와 기의 합으로 보고 이 것을 명덕이라 표현한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고 이에 대해 반응하는 기제를 오로지 기로만 설명하는 정도전과는 달리 리를 감응의 핵심요소로 파악한다. 마음을 이와 기의 합으로 본다는 것은 선한 행위의 근거를 마음 안에 두는 것이다. 마음의 체를 성으로 보고 마음의 용을 정으로 보아, 마음의 체가 확립되고 사욕에 의해 차단당하지 않으면 인간의 선한 감정과 행위가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인(仁)으로부터 저절로 발현된다 고 보는 것이다.이러한 윤리적 태도는 주희의‘바뀔 수 없는 소이연(所以然而不可易), 그칠 수 없는 소당연(所當然而不容已)’이라는 표현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윤리 적 태도를 체용관계로 말하면 소이연은 마음의 체가 되고 소당연은 마음의 용이 된다. 이러한 체용론에 입각하여 유학의 경전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권근의 경전 해석 전 반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이다. 마음을 기로 보느냐 이와 기의 합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한국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첨예화된 것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이 다.사단을 이발(理發)로, 칠정을 기발(氣發) 보는 것은 마음을 이와 기의 합으로 보는 것이고, ‘칠정 밖에 다른 감정이 없다’고 보는 것은 마음을 기로 보는 것이다. 상이한 두 이론 사이의 핵심 쟁점은 조선 초기 정도전과 권근 사이에서 뚜렷한 형태로 그리고 더 폭넓은 형태로 이미 발아하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