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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미학지평을 통해 메를로-퐁티의 유물론과 들루즈의 유물론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밝히려는 목적을 지닌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물질도 정신도 아닌 "제 3의 존재장르"인 메를로-퐁티의 살(氣)의 존재론으로 들루즈의 경성 유물론(Hard Materialism)을 비판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의 살은 내재적 초월성이요, 들루즈의 힘은 철저 내재성 곧 극단 내재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존재론의 비교는 인간과 그의 세계 그리고 예술작품 사이의 연속성의 문제를 쟁점으로 하고 있는데, 예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메를로-퐁티로서는 이해 가능한 특성을, 들루즈로서는 이해 불가한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들루즈의 예술도 사유로부터 발원하지만 들루즈의 이해가능성 곧 인지력 유형은 지성적이거나 표상적인 그 아무 것도 지니지 않는다. 오로지 기운들이 예술가로 하여금 창작품을 생각하도록 강제할 뿐이므로 예술은 들루즈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는다. 메를로-퐁티가 예술창조를 통해 살의 반성력을 심층적으로 수행하는 반면, 들루즈는 메를로-퐁티가 구축한 자아와 세계에 공통되는 선험질료인 살(chair)의 운화로서의 ‘지각’ 이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들루즈가 비판하고자 하는 지각이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라는 패러다임의 표상-가능적 세계 안을 흐르면서 초월성을 회복시키지만, 예술의 혁신과 그것의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할뿐더러 예술가가 겪는 창조의 고뇌 역시 해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루즈는, 예술가를 밀어붙이는 生의 폭력성에서 온 맹목적 기운(forces)과 미학적 창조를 서로 만나게 한다. 한편 예술이란 우리가 적응하고 또 조율되고 있는 체험세계와의 연속성 가운데서 발생한다는 이유로 메를로-퐁티는 이 예술 안에 합리성과 관념성의 차원을 수용하고 있다. 이와 정반대의 들루즈에게는 예술이 맹목적이고 완전히 비합리적인 그 무엇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이성이 마비된 메두사의 상태 그리고 몰아의 경지라는 ‘표상할 수 없는’ 차원에서 예술의 출발을 보는 것이다. 결국 들루즈의 눈에 메를로-퐁티는 역설적이게도 정신주의자가 되는데, 이때 후자는 물질과 정신 사이의 단절로부터 벗어나 살의 ‘선험성’과 이어질 수 있다는 초월성의 탐색에 사로잡힌 자가 된다. 반면 메를로-퐁티에게 이 살의 선험성이란 그 자체로 이미 先지각적이고 원초적인 관념성의 어떤 형태가 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적 <불투명성>에 내재적인 “자연의 빛”과 유사한 골조이다. 자신의 철저 내재성의 이념과 더불어 마침내 들루즈는 경성(dur) 유물론자이기를 자처하게 되는데, 이처럼 단단한 유물론은 잠재적 관념성조차 포기한 극단적 경험론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철저화한다. 나아가, 정신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면서 필경 이 정신을 보존하고야마는 철학적 전통의 영역을 변혁하는 소위 탈속령화까지 수행하게 된다.


Cet article a pour but d'éclairer la différence essentielle entre le matérialisme de Merleau-ponty et celui de Deleuze dans l'horizon esthétique. Il critique le matérialisme dur de Deleuze par l'ontologie de la Chair(Qy) qui n'est ni esprit ni matière, c'est à dire, le “troisième genre d'être”. La chair est transcendance immanente, la force est immanence radicale. Dans ce contexte, la comparaison des conceptions de l’art chez Merleau-Ponty et Deleuze a pour enjeu la continuité entre l’homme (et son monde) et l’oeuvre, donc le caractère intelligible ou non de l’art. L'art chez Deleuze est, certes, de la «pensée», mais son type d’ intelligibilité n’a rien d’intellectuel, de représentatif. Des «forces» contraignent l’artiste à «penser» une oeuvre. L'art reste une énigme pour Deleuze. Merleau-Ponty fait de la création artistique un approfondissement de la réflexivité de la Chair. Deleuze conteste l’idée de la perception comme “chair”, commune au moi et au monde, qui reste dans l’univers de la représentation (visible/invisible), récupère la transcendance et ne rend pas compte des grandes ruptures et des grandes innovations de l’art, ni des affres de la création "forcée" chez l’artiste. Deleuze rapporte la création à l’affrontement de forces aveugles, venues de la violence de la vie, qui poussent à créer comme elles “forcent à penser”. Merleau-Ponty admet une dimension d’idéalité et de rationalité dans l’art, puisqu’il est en continuité avec un rapport au monde vécu, rapport qui suppose des formes d'adaptation, dans une rationalité. Au contraire, pour Deleuze, l’art commence avec quelque chose d’aveugle, d’irrationnel : on est dans l’ordre de l’extatique et du médusé, de l’irreprésentable. Merleau-Ponty reste spiritualiste aux yeux de Deleuze, ce qui est discutable. Deleuze refuse l'idée de la chair comme en-deçà de la séparation entre matière et esprit. Les deux sortes d'immanentismes se divisent ici même. Le tendre de la chair n’est pas immersion mais "membrure" qui appartiendrait à l'opacité ontologique chez Merleau-Ponty. Avec son idée de l'immanence radicale, Deleuze semble un dualiste entre la forme et les forces. Aussi reste-il un matérialiste dur. Il radicalise le matérialisme dans le sens d'un empirisme radical qui change complètement de terrain par rapport à la tradition philosophi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