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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제정치질서 개편기였던 1919~ 1923년 반임시정부노선을 견지했던 신채호의 국제정치 인식을 다루었다. 특히 당시 국제정세의 견인 담론이었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신채호가 가졌던 이해의 방식과, 그 적용방식에 대한 고찰에 중점을 두었다. 신채호는 파리강화회의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청원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에서 청원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한국의 지식인들이 ‘민족자결’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변용시켜 받아들였던 것처럼, 신채호 또한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이해했다. 이처럼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하는 입장에서 신채호는 아시아문제가 중심이 될 워싱턴회의는 한국 독립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적합하다고 여겨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 때 신체호가 제시했던 국제정세 이해와 해법은 자신이 비난하던 상해의 외교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채호는 민족자결주의를 독립운동론에 적용하는 방식에서 이들과 차이를 보였다. 민족자결의 원칙을 바탕으로 독립을 표명하기 위하서는 그에 맞는 실력이 겸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채호는 3·1운동을 계기로 한국도 민족자결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3·1운동으로 고양된 분위기를 군사적 성공으로 이어가기 위해, 적의 강약여하에 관계없이 즉각적인 군사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신채호가 주목했던 독립전쟁방략은 일제에 대한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한 후에 외교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완전히 몰아낸다는, 先무장투쟁󰠏後외교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