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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는 1934년에 발족하여, 1940년대까지 활동한 판소리창자의 모임이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등 이른바 4명창을 중심으로 193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조선음률협회’를 계승한 단체이다. 창립 시점에서는 ‘조선성악원’, ‘조선음악연구회’, ‘조선성악회’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역사적 연원은1925년경부터 시작된다. ‘조선악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이동백, 김창룡등은 1925년 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춘향가」와 「심청가」 판소리 공연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이 조선악연구회는 결속력이 높은 단체라고는 할 수 없었는데, 이후 ‘조선음률협회’로 재정비되었고, 결국 조선성악연구회의 모태가 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성악연구회는 창극 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한국 창극 양식 정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성악연구회가 창극 정립 운동을 펼쳐나간 시점에 대한 세심한 고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그들이 창극 정립에 나선 이유와, 작품 취택 방법, 그리고 이러한 주력활동 전환의 의의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본고에서 가장 주목해서 다루고자 하는 논점은 조선성악연구회가 전래의판소리 가창을 창극 양식으로 전환한 이유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대답이 존재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 연구에서는 1934년 창립부터 1935년 「춘향전」 공연에 이르는 그들의 상황과 선택을 중심으로시대적 정황과 예술적 전개 과정을 논구하고자 했다. 조선성악연구회가 이러한 창극화의 도정이라는 모험을 선택한 이유는, 레퍼토리의 확대와 양식의 다변화 그리고 창극 보급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전의 창극을 복원하는 것만으로는 구악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 수 없다고 단정했으며, 보다 파격적인 공연 활동이 필요하다고 자체 진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실험과 도전의 1년 남짓 기간은, 구악의 레퍼토리로 간주되며, 그토록 반복 재공연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춘향전」의 가치에 대한 재확인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1936 년 9월 조선성악연구회는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했던 「춘향전」을 다시무대에 올리면서, 창극 정립을 위한 1935∼1936년의 도정을 일차적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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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聲樂硏究會’は、1934年に発足して、1940年代まで活動した ‘パンソリ’(Pansori epic chant)歌唱の集まりだった。1930年代後半に入 ると、朝鮮聲樂硏究會は唱劇の公式運動を主導し、その結果、韓國唱 劇フォームの公式の基礎を築くことができた。しかし、朝鮮聲樂硏究 會が唱劇の公式運動を展開していった時点では、まだ細かいところま で考察されていなかった。つまり、彼らは唱劇確立に邁進した理由 や、その作品を選択して、公演した方式、そして主力の活動を転換し たの、これについては、明確に説明されていない状態である。二重で 本稿で最も重要な対処論点は、朝鮮聲樂硏究會が伝来の「パンソリ」歌 唱を唱劇様式に転換した理由である。その理由については、常識的な 答えだけ存在している状況である。しかし、この研究では、1934年創 立から1935年9月「春香傳」公演に至る‘朝鮮聲樂硏究會’の状況と選択 を中心に、時代的状況と芸術的展開過程をノングしよう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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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聲樂硏究會, 東洋劇場, 連鎖唱劇, 唱劇, 「春香傳」, 「裵裨將傳」, 「劉忠烈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