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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산업생산 양식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판소리는 조선시대 후반에 한국 전통사회에서 발생하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성악중심의 전통 공연예술 양식이다. 판소리 연구물들 중에, 판소리와 그것을 낳은 사회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즉, 판소리가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을 토대로 하여 발전하였는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판소리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접근하려면, 판소리를 둘러싼 ‘외재적 조건들’과 판소리 자체의 ‘내재적 구조’를 동시에 조화롭게 논의해야만 한다. 판소리의 ‘외재적 조건’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판소리가 한국의 도작농업(稻作農業) 중심지역에서 발생하고 유행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판소리의 발생-기원설 및 판소리 명창 광대의 출생지를 검토해 볼 때 분명하게 입증된다. 역대 판소리 명창들은 대체로 호남지방과 경기ㆍ충청지방 등 주로 우리나라 서남부 지역에서 출생하였으며, 이 지역은 바로 우리나라 최대의 도작농업 중심 지역이자 곡창지대이다. 판소리는 또한 한국의 도작농업 중심 사회의 전통적 무당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그런 직업적 혈통 계승과 함께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단골판’을 세습적으로 물려받았다. 이 ‘단골판’은 그들의 경제적 권한이자 기반이었다. 판소리가 발달하던 18~19세기의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부의 중심이 ‘논’과 ‘쌀’에 있었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또한 전통 도작농업 사회의 중산계급 및 중인계급/아전계급, 그리고 상류 지배층의 취향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도작농업 중심 사회가 근대 산업중심 사회로 변화함에 따라, 판소리는 근대 한국의 오페라인 ‘창극’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은 판소리가 사회구조의 변화에 적응해 나아간 유연한 적응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판소리의 ‘내재적 조건’ 곧 판소리의 ‘시학’을 논의하는 데는 리차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가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사회극(social drama)’ 이론을 연극학의 입장에서 ‘예술극(stage drama)’과 관련시켜 도식화한 ‘사회극-예술극 모델’을 참고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셰크너의 시각에서 볼 때, 판소리는 근대 이전 18~19세기의 도작농업 중심 사회의 ‘사회/사회극’을 판소리라는 ‘예술극’ 속에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다음 3가지이다. 첫째, 판소리는 그것의 예술적/시학적 구조 속에 전통 도작농업 중심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노동구조/노동양식인 ‘벼농사 두레노동’의 노동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둘째, 판소리는 전통 도작농업 사회, 특히 판소리가 가장 널리 유행한 호남지방의 근대 이전 사회가 지향한 이상적 패러다임을 ‘반영’하고 있다. 셋째, 판소리는 사상사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중시하는 서양의 사조와 달리 사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의 사조를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판소리는 ‘시각적 비전(landscape vision)’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라, ‘청각적 비전(soundscape vision)’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예술이다. 이러한 공연예술 양식은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의 도작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들의 공연예술들인 중국의 핑탄(評彈), 일본의 분라쿠 등과 함께, 이러한 ‘소리중심의 문명사적 비전’을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시각적 비전(landscape vision)’ 곧 시각중심의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사적 현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지나친 물신화(物神化)ㆍ탈영성화(脫靈性化) 등의 문제점들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