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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는 충군애국을 읊었다는 ‘애국백인일수’를 식민지 조선에서 확산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예컨대 ‘애국백인일수’에 관한 강연과 낭영회를 열기도 하고, ‘애국백인일수’의 가루타를 보급하거나 ‘애국백인일수’를 조선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또한 ‘애국백인일수’ 전람회를 개최하여 ‘애국백인일수’ 색지와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학교 교육으로는 부족한 계몽과 선전 등을 사회 교육으로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일제가 전람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은 그것이 문화통치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박물관, 박람회와 더불어 근대의 산물인 전람회를 통해 제국 일본이 문명국임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선행연구는 ‘애국백인일수’ 전람회의 출품작에 대해, 특히 어떤 조선인 미술가가 이 전람회에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지적과 1943년 1월 6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를 종합하여 ‘애국백인일수’ 전람회에 조선미술가협회의 회원인 김은호가 참여하여 출품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화필 보국, 예술 봉공의 일환으로 전람회에 참가하여 작품을 전시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Imperial Japan was very aggressive in spreading One Hundred Patriotic Poems by Joseon, holding a special lecture on the classical Japanese anthology, having it translated into Korean, and hosting the One Hundred Patriotic Poems Exhibition. Despite considerable research achievements, previous studies have failed to unveil the name of a Korean artist who participated in the One Hundred Patriotic Poems Exhibition. This study discloses that it was the artist Kim Eun-ho who participated in the exhibition by presenting the historical context and background of the exhibition.


太平洋戰爭の勃發後、日本は戦意を高めるため、植民地朝鮮に忠君愛國を詠んだとされた「愛國百人一首」を普及しようとした。たとえば、「愛國百人一首」に関する展覽會を開催し、展覧会で「愛國百人一首」の色紙を展示したり、「愛國百人一首」と関連する作品を出品したりした。學校敎育では物足りない啓蒙や宣傳などを社会敎育で賄うためだった。日本は博物館や博覽會とともに、近代の産物たる展覽會をもって帝國日本が文明國であることを表し、またそれを文化統治の一環として生かそうとした。 植民地朝鮮における「愛國百人一首」の受容樣相についての今までの先行硏究は数少なくない硏究成果を出してきた。が、「愛國百人一首」の色紙や作品について、特にこの展覧会にどんな朝鮮人美術家が参加したかについては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本稿では「愛國百人一首」の博覽會に朝鮮美術家協會の会員、金殷鎬が参加し、出品し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戦後、金は美術家として侵略戦争に協力したことは、当時としてはやむをえない行為だったと弁明した。しかし、彼が畵筆報國や藝術奉公のための作品活動をしたことは、動かない歷史的事實であることには変りが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