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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성종조 대두되었던 ‘남녀상열론’을 그 당시의 정치적 사건과의 상관성 속에서 고찰한 것이다. 남녀상열론은 가사에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을 들어 고려속요를 비판한 논의들로 이와 같은 조선 유학자들의 평가는 고려속요에 대한 현대 연구자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재래의 연구에서 ‘남녀상열지사’라는 수식어의 출현 배경과 그 의미적 변전을 논의하였으나 유교적 통치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투영, 혹은 언어의 측면에서 俚語 수용문제와 같이 사상․문화적 측면의 해석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본고는 정치적 사건과의 관계에 집중하여, 당대의 정치적 현안을 계기로 부상하게 된 남녀상열론을 고려가요에 대한 조선시대의 인식의 전모인 것처럼 가정하지는 않았는지 반성적 시각을 마련해 보고자 하였다. 성종은 음악에 조예가 깊을 뿐 아니라 궁중의 연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즐겼던 임금이다. 그는 적재적소에 음악을 배치하여 군신이 함께 즐기는 연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임금으로 여악에도 관대한 축에 속하는 왕이었다. 이러한 성종이 재위한지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 갑작스럽게 속요 <서경별곡>의 가사를 문제 삼는 모습은 음악에 대한 그의 평소 인식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실제로 <서경별곡>을 남녀상열지사로 명명하게 된 계기는 같은 시기에 벌어졌던 외교의례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19년(1488)년 조칙을 반포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들은 조선의 접빈례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그릇됨을 지적하여 조선 측에 큰 곤란을 안겨주었다. 이는 조선-명의 관계에서 명의 세력이 더욱 켜져 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은 자국의 위상과 향후 입지를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조선은 중국 사신에게 조선 풍속의 미개함을 비하하는 ‘남녀상열’이라는 기록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하여서, 여러모로 ‘남녀상열론’이 가시화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신 접견이 끝난 지 보름 후에 성종은 종묘례에 참석한 뒤 <서경별곡>을 남녀상열지사라고 명명하며 가사 수정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성종이 들었던 것은 <서경별곡>의 곡조이지 가사가 아니었다. 이는 사신 접견 이후 속악에 한층 민감해진 성종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남녀상열지사 논의는 고려속요에 대한 조선시대의 보편적인 인식이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현안과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This paper aims at Namnyeosangyeollon in king Seongjong’s reign. Goryeo- sogyo has been indicated as Namnyeosangyeoljisa which means the song of love between man and woman. In former studies, the main reason of Namnyeo- sangyeollon was Joseon’s ruling ideology. According to the former studies, Joseon dynasty’s ruling ideology was Confucianism, so these kind of love songs were inappropriate for court music. This studies have some valid point, but they overlooked the fact that Namnyeosangyeollon was not continuous argument. It only took place in king Seongjong and Jungjong’s reign, so the corelation might be more clear when it comes to political incident. In this study, I examined that the corelation between the incident about political protocol which took place in 19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At that time Joseon greeted Chinese ambassador, and there were some unpleasant moment between ambassador and Joseon, and it caused bruised pride of Joseon. Because of this experience king Seongjong’s thoughts about music was changed like more political way. It is rather unfamiliar attitude because king Seongjong was very generous and having deep knowledge when in comes to court music. Therefore, Namnyeosangyeollon was the deeply linked with the political issue of that time, and understanding about Namnyeosangyeoljisa has to be changed becaused it is not the whole point of Goryeo-so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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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nyeosangyeollon, Namnyeosangyeoljisa, Goryeo-sogyo, Goryeo- ga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