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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스 그륀바인의 처녀 시집 아침의 회색지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 시집에 이르기까지 거듭해서 나타나는 모티프 중의 하나는 죽음의 문제이다. 그는 고대에서부터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종류와 그 양상을 집요하게 쫓고 있는데, 이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죽음의 표상 속에 한 사회의 삶의 방식과 예식, 세계관 혹은 내세관 등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이 마지막 순간에 한 개인이나 사회가 가진 삶에 대한 이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본 논문은 두어스 그륀바인의 고귀한 고인들에게란 시집을 중심으로 묘비시란 형식과 그 속에 나타난 죽음의 양상들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선 그는 이 시집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묘비시란 시 형식을 자신의 시대를 위해 새롭게 되살려낸다. 그러나 죽은 자를 기리고 남은 자들을 위로하기 쓰여졌던 전통적인 묘비시와는 달리 그는 이 시집에 실린 33개의 묘비시들에서 현대 사회에서 매일 같이 부딪치게 되는 죽음의 양상들을 감상적인 우울이나 산 자에 대한 도덕적인 요청이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신문이나 텔레비전과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죽음에 관한 보고들이 전통적인 묘비시를 대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아가 유전공학이나 안티 에이징 등 온갖 의학적, 기술적 장치를 통해 삶을 연장하려는 현대 사회의 시도들은 죽음을 기피하고 터부시하지만, 오히려 죽음은 어느 때보다 우리의 삶 속에 가까이 스며들어와 있다. 두어스 그륀바인은 그의 특유한 해부학적 시선을 통해 대도시의 고속도로나 지하철, 놀이공원이나 콘크리트 건물 등, 어디서나 목격되는 익명의 죽음들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목가적인 자연풍경 속에서 소리없이 산화되어가는 짐승들의 시신들까지 놓치지 않고 추적한다.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종교적인 위안의 흔적 없이 물질주의적이면서도 문화비판적인 분석을 통해 그는 현대 사회에서 존엄성과 비극성을 잃어버린 값싼 죽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륀바인의 이 시집은 궁극적으로 모든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묘비명이라 할 수 있으며, 포스트 모던적인 ‘메멘토 모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