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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항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서술에 기대어 천지의 창조를 기표의 창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 기표를 ‘의미’라 할 “아무 것도 없는 것” 즉 ‘무’로 규정한다. 항아리가 진짜로 기표이고 그것이 최초로 인간의 손에 의해 조형된 기표라면, 그것은 기표로서의 본질에 있어 기표 외에는 어떤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기표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특별히 의미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하늘과 땅의 본질의 중심에 배치한다. 그것은 무엇을 마시는 제사 행위에서 구현되는 이중적 지향을 통해 근원적인 결합을 묘사한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위를 향하며, 어떤 것을 내어놓기 위해 그는 땅을 향한다. 그것이 바로 정확하게 항아리의 기능이다(Lacan 1996, 149). 라캉에게 ‘무’는 ‘존재’의 장소(Lacan 1990, 340)이자 ‘존재하는 것’으로 이동하는 과정 중에 있는 차이의 장소이다. 항아리는 빈곳이자 ‘채우기’의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 중에 있는 차이의 기표이다. 라캉에 따르면 “기표들은 일단 차이 자체가 존재하고 있음만을 표명하며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Lacan 2011, 36). 그러면서도 기표는 채워지기 위해 있다. 기표의 이중적 성격은 여기에서 나온다. 기표와 기표 사이 차이는 그의 효과로서 의미를 생성하며, 의미가 기표의 효과이기에 양자는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라캉의 용어인 “없는 기표 fehlender Signifikant”는 ‘비어 있는 차이’를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이 결핍과 비어있음이 기표 작동의 바탕이며, 역동적인 상상적 질서의 바탕이다. 본고의 의의는 프레게의 ‘지시의미’가 라캉의 이론에서 어떤 설명적 능력을 갖는지 규명해보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원적으로 억압된 팔루스와 기표사슬 사이에서 작동하는 차이의 성격은 보로메오 고리의 외부에서 근원적 기표이자 지시의미로 작용하는 팔루스와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기호의미의 ‘위치’를 통해 제대로 해명될 수 있다. 여기에서 팔루스는 구체화된 ‘지시의미작용’을 요청하며,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 무의식을 포함하는 ‘기호의미’이다. 소쉬르가 기표를 기의에 종속시키는 것은 차이 속에서 작동하는 상상을 상징적 질서에 부속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상상을 상징적 질서에서 해방시키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기표를 의미에서 해방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가 자립적이 되고 그의 단순한 모사 기능에서 해방되자마자 분산이 시작되며, [...] 진기한 생기효과들 Animationseffekte, 그리고 세계 속에서의 무의식적 메시지가 시작된다”고 한다(Lacan 1999, 90). 또한 “목적원인”, 즉 특정 목표만을 지향하는 원인은 “과학을 거스르는 것”이며, 설사 ‘목적원인’이 있다 해도 특정한 “의미를 위해 기표를 사용할 사람이 없다는 것”(Lacan 1999, 222)을 과학의 특징이라고 한다. 사이버네틱스는 인간 주체의 조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표가 스스로 기표를 부르는 “작동적 폐쇄성”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특정 ‘목적원인’에서 자유로운 그러한 작동방식은 인간과 사이버네틱스 사이의 유사성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형식 사이 ‘차이’에는 인간적, 자연적 형식이 작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버네틱스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바탕이기도 하다. ‘진리가치’와 ‘지시의미’를 중시하는 프레게와는 달리 지시의미에서 자유로운 기표의 창조성을 라캉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자연법칙은 자유를 준다. 즉 지시의미작용 없는 공식은 자유를 준다. 그것이 적게 의미할수록 우리는 더욱 만족스러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의 완성에 아주 만족한다. 그것은 순수한 기표이다(Lacan 1997, 218 f.).


Lacans Text “Die Bedeutung des Phallus” hat im Original einen deutschen Titel, der Vortrag wurde auf deutsch gehalten. In diesem Seminar hatte Lacan die Funktion des Phallus durch Bezug auf Freges Unterscheidung von Sinn und Bedeutung erläutert. Beim Phallus geht es nicht um den Sinn, sondern um die Bedeutung. Lacan erklärt, der Phallus sei das Urverdrängte. Das Urverdrängte ist Freud zufolge das, was die anderen Signifikanten in die Verdrängung zieht, selbst aber nie in Erinnerung gerufen werden kann. Lacans Bemerkung über das Seiende und das Sein verweist darauf, dass mit dem Schnitt nicht einfach das Intervall zwischen den Signifikanten gemeint ist, sondern zugleich die Differenz zwischen dem Sein und dem Seienden. Diese Differenz bezieht sich auf das “Zwischen”, das beide vermittelt. Die Entwicklung zu den Elektronenröhren der Computer des 20. Jahrhunderts wird zum technischen Apriori des Lacanschen Unbewußten. Ein elektrisches Feld existiert nicht für sich seiend neben einem nachfolgenden Feld, ein elektrisches Feld induziert nur durch ein Zusammenbrechen ein magnetisches Feld usf. Irgendwann kommt es zur Erscheinung eines Wesens, das nirgend ist, zur Erscheinung der Fee Elektrizität, die das Sein klüftet, digitalisiert. Und da geht es nicht länger um eine Abfolge oder Abgrenzung von Saussureschen Zeichen, vielmehr geht es um Signifikanten als diskrete Elemente als solche. In diesem Sinne weist Lacan darauf hin: “Ein Naturgesetz freilegen, das heißt eine bedeutungslose Formel freilegen. Je weniger sie etwas bedeutet, umso zufrieden sind w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