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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영화매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움으로써 영화인들을 설득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기대와 희망 속에서 실시되었던 일련의 영화정책은 그러나 심각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켰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던 소, 대형 영화제작사와 소, 대형 극장주들의 갈등은 물론이고 유명, 무명배우나 스텝들의 개런티 차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불공정한 관계 등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고착화되거나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영화조직이나 기관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소수의 유명 영화배우나 영화감독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세력을 확장해 가거나 유명세를 떨쳤던 반면 그렇지 않은 영화인들은 그들의 그늘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제작비가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것이었다. 많은 영화인들의 망명이나 활동금지로 인해 독일에 남아 있는 영화인들의 보수가 상승했고, 사전검열에서 요구하는 영화수정은 제작기간을 연장시켰는데, 이 모든 것들이 제작비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1933-1936년 사이 제작비는 95%나 증가했고 많은 영화사들이 그 비용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더구나 외국에서의 독일영화 보이콧으로 인해 독일영화의 외국 수출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1933년 영화수출을 통해 제작비의 44%를 충당하던 것이 1937년에는 겨우 7%에 지나지 않게 됨으로써 재정적 어려움은 더 커져갔다(Vgl. Moeller 1998, 83). 이렇게 영화 전체 수익이 계속 낮아져 결국 전혀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었다(Vgl. Spiker 1975, 143). 게다가 중소 영화제작사를 우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영화신용은행이 대형제작사들 위주로 지원하면서 중소제작사는 소외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소 영화제작사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결국 자본주의 폐해의 철폐를 외치면서 시행되었던 나치정부의 영화정책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영화산업은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나치정권은 오히려 새롭게 대두된 영화의 위기를 독일영화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나치정권은 1937년 대형 영화제작사인 우파, 토비스, 테라, 바바리아를 국유화했으며 1942년에는 모든 제작사를 우파로 통합시켜 우파를 독점 제작사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모든 영화가 우파에서만 제작될 수 있음은 물론 우파가 모든 영화들의 배급, 상영까지 독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치정권의 완전한 영화매체 장악프로젝트는 완성 되었다. 제작, 배급, 상영의 일원화를 통한 독일영화 전체의 장악은 나치정권이 목표한 것이기도 했다. 영화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나치정권의 영화정책은 그러나 독일만의 일이 아니었다. 나치의 영화정책은 1930년대 말 일제에 의해 수용, 나치영화정책을 모델로 일본 본토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실시됨으로써 조선영화인들로 하여금 친일의 길을 걷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치의 영화정책이 조선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나치영화정책이 식민지 조선영화에 미친 영향(2)’이라는 주제 하에 진행되는, 나치 영화정책과 일제 말기 조선 영화정책을 비교분석하는 두 번째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예정이다.


In dieser vorliegenden Arbeit wird versucht, eine Überblick zu verschafften, wie das Dritte Reich die Filmfinanz und die Filmschaffenden durch die Filmpolitik unter Kontrolle gebracht hat. Als das neue Medium Film in die Welt kam, nahm Deuschland anders als die anderen Länder darüber sehr ernst, daß die bewegten fotografischen Bilder des Films die höchste Realitätsnähe der Darstellung ermöglichen und daher der Film auf den Zuschauer einen großen Einfluß nimmt. Besonders die Intellekturellen erkannten das Filmmedium als Erziehungsmittel des Volks und behaupteten, daß der Film für die gesamte Völkerung dienen muß und den positiven Einfluß auf die Schule und die Gesellschaft ausüben soll. Dieser konservativen Filmdiskurs verbreitete sich und schlug seine Wurzel in die deutschen Gesellschaft der Weimarer Republik und wurde in das Dritte Reich überliefert. Nach der Machtergreifung der Nationalsozialisten im Jahre 1933 übernahm Goebbels als Reichsminister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die Lenkung des gesamten Kulturbereichs. Er erkannte, daß der Film für die Nation dienen kann und zur politischen Beeinflussung geignet ist. Der Film muß von einem einheitlichen staatlichen Willen kontrolliert werden und als Vortrupp der nationalen Propaganda fungieren. Zuerst wurde im Jahr 1933 die Filmkreditbank GmbH, die die Filmproduktionsfirmen finanziell untersützen soll. Durch diese finanzielle Filmpolitik laßten sich die Filmfirmen unter der politischen Ideologie unterwerfen. Goebbels setzte nicht nur auf eine finanzielle Unterstützung, sondern vor allem auf eine personelle Neuausrichtung der Filmproduktion, und im gleichen Jahr wurde die Reichsfilmkammer gegründet. Wer in die Reichsfilmkammer nicht aufgenommen oder ausgeschlossen wurde, dürfte nicht als Regisseur, Schauspieler, Kameramann oder Produzent tätig sein. Das bedeutete Berufsverbot. Und durch das Lichtspielfilmgesetz im Jahr 1934 Goebbels brachte letzt endlich die ganzen Filmindustrie unter Kontro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