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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종래 중국사의 맥락에서 주로 파악되었던 ‘安史의 亂’(755~763)을 북아시아 세계의 맥락에 위치 지워 재인식하려는 의도로 저술되었다. 중국사 속에서만 안사의 난을 인식하면 그 사건에 관련된 다면적 역사상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안사의 난을 일으킨 군사세력 안에 이란계의 소그드인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안록산과 그 휘하 무인들이 ‘돌궐화’된 소그드 무인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진원지인 幽州에는 당조 성립 이래 귀순해온 북아시아 여러 종족들, 특히 돌궐 유민들이 배치되었다. 안사의 난 직전에 유주에 있던 북・동북아시아계 諸族의 비율은 인구의 약 37%~40%가 되었음을 당시의 기록으로부터 추산할 수 있고, 또한 북경의 西南 약 70㎞ 부근에 있는 房山雲居寺에 奉納된 石經題記의 분석을 통해 해당 지역에서 소그드계로 분류되는 인명을 840명 이상 발견되므로 다수의 소그드인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절도사였던 안록산은 기미주민들을 군사적으로 동원하였고 假父子관계를 통해 북아시아계 部落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휘하에는 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그드인들은 장교들 사이에 많이 분포하였고, 그 외 병사들 가운데에서도 상당수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록산의 반란군에 포함된 ‘소그드계 돌궐’은 돌궐 제1제국과 제 2제국의 시대에 걸쳐 유목화 된 ‘부락’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비록 안사군은 해, 거란 등 다른 부족들과 한인들도 포함되는 다양한 구성이었지만, 최종적으로 강대한 군사력이 되어가는 것은 745년 돌궐 제 2제국 붕괴 후 소그드계 돌궐 및 돌궐계 諸집단을 흡수한 이후이다. 이것은 소그드계 돌궐의 흡수는 안록산 자신이 소그드인이었던 점에서 좀 더 용이했을 것이며, 안사의 난의 발발에는 어쩌면 소그드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안사의 난을 이해하는 데에는 중국 내부의 모순 이외에도 내륙아시아의 정세와 내륙아시아 출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사군 내의 다양한 민족 구성은 소그드계와 비소그드계의 갈등으로 이어져 카리스마적인 리더가 사라진 후에는 반란 세력이 응집력을 상실하고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