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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는 사서삼경 중 진위논쟁이 가장 분분한 儒經이요, 闕誤와 錯簡이 많아 경문 해석에도 異說이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상서학 연구에는 개별 경학가의 學的특징을 연구하는 방법론 외에, 『상서』의 특정 대목에 대한 해석의 전반적인 흐름을 천착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그것이 周書<洛誥> 1장 ‘復子明辟’을 선택해 蔡沈의 주장 및 조선시대諸家의 논변들을 고찰한 본고의 목적이자 당위성이다. ‘復子明辟’에 대한 해석은 漢唐先儒의 復政說과 朱子의 제자 蔡沈의 復命說로 양분된다. 先儒는 7년 동안 섭정하던 周公이 東都낙양을 경영할무렵 成人이 된 成王에게 復政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채침은 주공이 王命을 받아 낙양을 경영한 뒤 成王에게 復命한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채침은 成王즉위 이후 天子는 항상 성왕이었기 때문에 주공의 復政이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물론 채침도 주공의 섭정을 인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주공의 섭정이란 幼沖한 성왕 대신에 當國했다가 후일에 復政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居喪하는 군주 대신 백관을 총괄해『상서』는 사서삼경 중 진위논쟁이 가장 분분한 儒經이요, 闕誤와 錯簡이 많아 경문 해석에도 異說이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상서학 연구에는 개별 경학가의 學的특징을 연구하는 방법론 외에, 『상서』의 특정 대목에 대한 해석의 전반적인 흐름을 천착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그것이 周書<洛誥> 1장 ‘復子明辟’을 선택해 蔡沈의 주장 및 조선시대諸家의 논변들을 고찰한 본고의 목적이자 당위성이다. ‘復子明辟’에 대한 해석은 漢唐先儒의 復政說과 朱子의 제자 蔡沈의 復命說로 양분된다. 先儒는 7년 동안 섭정하던 周公이 東都낙양을 경영할무렵 成人이 된 成王에게 復政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채침은 주공이 王命을 받아 낙양을 경영한 뒤 成王에게 復命한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채침은 成王즉위 이후 天子는 항상 성왕이었기 때문에 주공의 復政이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물론 채침도 주공의 섭정을 인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주공의 섭정이란 幼沖한 성왕 대신에 當國했다가 후일에 復政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居喪하는 군주 대신 백관을 총괄해『상서』는 사서삼경 중 진위논쟁이 가장 분분한 儒經이요, 闕誤와 錯簡이 많아 경문 해석에도 異說이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상서학 연구에는 개별 경학가의 學的특징을 연구하는 방법론 외에, 『상서』의 특정 대목에 대한 해석의 전반적인 흐름을 천착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그것이 周書<洛誥> 1장 ‘復子明辟’을 선택해 蔡沈의 주장 및 조선시대諸家의 논변들을 고찰한 본고의 목적이자 당위성이다. ‘復子明辟’에 대한 해석은 漢唐先儒의 復政說과 朱子의 제자 蔡沈의 復命說로 양분된다. 先儒는 7년 동안 섭정하던 周公이 東都낙양을 경영할무렵 成人이 된 成王에게 復政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채침은 주공이 王命을 받아 낙양을 경영한 뒤 成王에게 復命한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채침은 成王즉위 이후 天子는 항상 성왕이었기 때문에 주공의 復政이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물론 채침도 주공의 섭정을 인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주공의 섭정이란 幼沖한 성왕 대신에 當國했다가 후일에 復政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居喪하는 군주 대신 백관을 총괄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총재로서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復子明辟에 대한 復政說과 復命說의 차이는 주공이 稚弱한 성왕을 대신하여 踐祚한 것처럼 섭정했는가, 아니면 그저 백관을 총괄하는 총재로서의 섭정에 불과했는가의 시각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하겠다. 조선전기는 채침의 『書集傳』에 바탕을 두고 『상서』를 궁구했으므로, 復子明辟의 해석도 채침의 복명설을 따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서집전』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상서학을 구축한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 윤휴와 박세당은 복명설을 채택하되 채침과는 거리를 두었고,성호 이익은 유성룡의 견해를 차용하여 채침과 유사한 논리로 복명설을주장하였다. 하지만 古訓을 중시하는 정약용과 신작은 복정설을 주장했고, 정조 또한 복정의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특히 다산은 古訓을 바탕으로이에 대해 상세히 분변하여 복정설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한 경학가였다.


Sangseo is a Confucian scripture whose words are very difficult to interpret. Paragraph ‘Bokja Myeongbyeok' is found in Section <Nakgo> that the scripture contain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that paragraph which is interpreted in two different meanings. In the Joseon period, an annotation that was most often used to provide guidelines for researching was Seojipjeon written by Chae Chim, a disciple of Chu-shi. Unlike prior annotations that usually interpreted ‘Bokja Myeongbyeok' according to the theory of Bokjeong, Seojipjeon relied on the theory of Bokmyeong in interpreting that paragraph. The theory of Bokjeong indicates that Jugong who had served for 7 years as a regent for the 13-year-old King Seongwang returned the political authority to that king who was adult when Nakyang was completely built up. While,the theory of Bokmyeong finds that ‘Bokjeong' was a nonsense because Jugong had never been enthroned to the Son of Heaven and that Jugong just reported the complete construction of Nakyang after he built up the city by order of the king. Joseon was a society based on Chu-Shi's Sung Confucianism, so it generally followed the theory of Bokmyeong on which Seojipjeon stood itself. Scholars like Yoon Hyu, Park Se Dang and Lee Ik employed that theory according to their own rationale as they critically accepted Seojipjeon. In contrast, another scholars like Jeong Yak Yong and Shin Jak agreed on the theory of Bokjeong since they thought highly of prior annotations other than Seojipjeon. This study sought to help understand Sangseo and research the Sangseo studies of the Joseon period by analyzing rationales on which those scholars who followed the theories of Bokjeong and Bokmyeong, respectively, ba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