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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00년 직후 기생이 된 九簫 李鳳仙(1894~1992)을 통해 官妓制度 해체기(1897~1908년)에 기생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재생산된 기생은 이후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하여 가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구소는 경남 언양 지방에서 한시, 서예, 거문고 솜씨뿐만 아니라 빼어난 미모로 이름을 떨친 기생출신 한시 작가이다.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던 이구소의 존재는 관기제도 해체기 기생의 정체성과 근대전환기 한시 작가의 존재방식을 잘 보여준다. 조선조 내내 거듭된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었던 관기제도가, 1897년 外方 官妓 해산을 시작으로 1908년 宮中 官妓 해산까지 이루어져, 마침내 전면 철폐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기생들은, 공노비의 妓役에서 벗어난 私的 활동이었지만, 妓業을 행하고 있었다. 관기 출신 기생들의 모습은 오랜 습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구소는 기생의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갔고, 당대 최대의 전국적인 詩社인 辛亥唫社에 시를 투고하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또한 이구소는 자신의 시를 自編하여 간행을 기획하였다. 당시 이구소의 시집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창작, 투고, 편집, 간행을 기획하였다는 것은 한시 작가로서 매우 지적이며 사회적인 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구소는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서, 공연 예술 문화에서 새롭게 스타로 자리 잡고 대중적 인기와 부를 축적한 악가무 기생이 아니라 詩妓의 삶과 행로를 잘 보여준다.


When she was a young apprentice gisaeng, Buyong enjoyed the courses to become a gwan-gi and hoped to show her ability. However she had to endure the exhaustion and suffering by yeok (corvée). The deeper she reflected her status as a gwan-gi, the better Buyong recognized the reality of gisaeng. And also she concluded that gwan-gi had to become Si-gi(詩妓) or Ye-gi(藝妓) to support herself independently and maintain her pride. In result, Buyong decided to follow Kim, I-yang and then took active attitude to him by using her poetic genius. At this time, Buyong had been exiled to Guseong(龜城) implicated in a case. This case paved the way for her decision that Buyong spend her lifetime with Kim, I-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