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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庵 宋時烈(1607~1689)은 17세기 조선의 정치 현장에서 남긴 족적이 뚜렷하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주자학자로서 문장에만 치력한 문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려 550여 편의 碑誌를 撰作하여 麗末에서 우암 당대-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 名人들의 삶의 애환과 풍취를 인상적으로 그려내었다. 본 논문에서는 17세기 碑誌 撰作의 현장에서 尤庵 碑誌의 위상에 주목, 尤庵 碑誌의 撰作 性向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우암 비지가 자리하고 있는 당대의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우암 및 그 지근의 인물들이 비지의 찬작 과정에서 나눈 제 논의들을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여 우암 비지의 찬작에 관한 사건의 전말을 밀도 있게 점검, 당대의 시대적인 한계와 조건 속에서 우암 비지가 보여주고 있는 대응의 양상과 고민의 현장을 파악해 보았다. 碑誌는 先祖 및 先賢의 생애와 위업을 기록, 현양하고 기억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어지는 목적성이 강한 한문 문체이다. 따라서 請者의 입장에서는 撰者의 자격과 역량이 매우 중시되었다. 우암의 경우 20세 이후 西人系 學問家, 名門, 名人들과 인적, 학적, 정치적 관계가 면밀해졌을 뿐만 아니라 文筆 역시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부단히 회자되었다. 특히 그의 나이 53세를 전후하여 王室을 위시하여 그의 주변 지인들에 의하여 부단히 비지의 찬작을 요청 받았으며 또 이 요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淸陰 金尙憲과 谿谷 張維의 계보를 이어 당대에 비지 찬작의 일가로 일컬어졌다. 우암은 一世의 是非를 정하는 수단으로써 비지의 기능을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찬자의 조건과 비지의 전개 방향, 세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비지의 공효성, 伸寃의 기능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찬자의 자격으로 우암이 중시한 부분은 단순한 文才에서 더 나아가 찬자의 생애가 유학의 義理를 철저히 담지해야 하며 의리상에 一毫의 하자도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우암이 완성하려 한 비지들이 유학 및 당시의 시대적 의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명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만큼 문필 능력에서 더 나아가 유학의 소양이 높으며 義理가 분명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찬자의 생애 역시 의리 상에 일체의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철저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암은 비지를 찬작한 후 청자의 요청에 따라 교정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작자의 義理 및 墓主의 인상과 인격이 비지 서술의 전개 과정에서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의식이 주효하였다. 그러나 작품의 교정을 요청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청자와 찬자 간의 갈등이 노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成文濬 및 尹宣擧의 생애를 기록한 「滄浪成公墓碣銘」과 「尹吉甫墓碣銘」을 둘러싼 제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滄浪成公墓碣銘」의 경우는 파산 문하와 사계 문하의 갈들을 해소하기 위한 실마리로 윤선거가 권유한 바 있으며 「尹吉甫墓碣銘」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老少 분기의 주요한 계기로 설명된 바 있었다. 그러나, 「滄浪成公墓碣銘」의 경우는 애초에 윤선거의 주장처럼 문하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계기로써 제시되기는 했지만 그 글이 찬작되기까지 수많은 논의와 갈등을 사전에 배태하고 있었고 「尹吉甫墓碣銘」의 경우는 그 찬작의 경위와 내용이 기존의 통념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음을 제반 자료를 종합했을 때 알 수 있었다. 비지의 찬작과 탈고의 과정에서 당대의 복잡한 논의들이 문예적 측면과 수사적 측면에서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논의가 정치적 논의로 확장되거나 정치적 위기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하였다. 문하와 문하, 집안과 집안 사이의 화합과 시비의 가능성, 17세기 서인계 문인 사회의 화합과 분열의 양상 또한 우암의 비지 찬작에 있어서 제기된 주요한 화제였던 것이다.


Wuam Song Siyol(1607~1689) as the representative statesman and neo- Confucian scholar, leaves giant footprints in 17th Joson political scene. Though he is not full-time writer, he edits and writes more than five hundred fifty volumes of epitaphs which embody the vivid life of notable persons from late Goryo to his contemporary, 17th Joson. I closely review editing and writing characteristics of Wuam's epitaphs in attempt to estimate their historic status. Therefore, I research his arguments about the edition of epitaphs and, also consider his respond and concern for the demand of his contemporary. The epitaph in classical Chinese is didactic genre to eulogize and memorize the life and works of ancestor and past sages. Hence, the official qualification and writing talent of its writer are essential issue for its orderer. Since Wuam is the most qualified figure in Soin school and family, as the successor of Chongeum(Gim Sanghon) and GyeGok(Jang Yu), he is appointed as the editor of prestigious epitaphs, including the epitaph of royal families, ceaselessly. Recognizing the role of the epitaph, the assessment of history, Wuam grasps its rhetorics and functions: improving common good and redressing injustice. Therefore the most vital terms of the editor of the epitaph is the Confucian righteousness. Wuam always listens to the request of epitaph's orderer and corrects his work afterward sometimes. For the epitaph shall meets three conditions as mentioned above: the request from epitaph's orderer, editor's style and Confucian righteousness, they could conflict one another occasionally, such as arguments about epitaphs of Yun Songo and Song Munjun. The actual editing and writing processes of epitaphs not only reveals literary and rhetoric issues but they can be extended to the political arguments and crisis. Wu am's editing and writing process of epitaphs is historic spot, reveals transitions of noble families, especially among Soin school and families in 17th Jo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