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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의 시 세계에서 시 「발걸음」은 다양한 변천과정을 거쳐 완성본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간행 텍스트들을 남겼다. 이 미 간행 초고들은 결정판 텍스트가 지워버린 시적 상상력의 소중한 변천과정을 간직하고 있다. 초기의 생성과정에서 “프시케”, “프시케의 다가옴”, 뒤이어 “녹턴” 이라는 제목이 부여되었던 이 시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또한 발레리의 시적 사고 안에서 ‘프시케’라는 대상이 ‘재형상화’ 되는 과정을 포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발레리에게 있어서 ‘프시케’의 선택은 그가 자신의 내적 요구와 미학적 관점에 부합되도록 이 신화의 여인의 이미지를 형성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발걸음」의 생성과정은 ‘프시케’ 라는 대상에 투여된 시인의 다양한 동기와 심리과정을 보여주며 이미지와 가치들의 계속되는 전도로 특징지어진다. 관능적 아름다움과 지적 호기심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는 고대 신화처럼, 「발걸음」의 전 텍스트 avant-texte는 그 다양한 변천과정을 통해 관능적 이미지와 그에 대한 지적 비판, 부정적 강박이 대립되는 밤의 몽상을 표현하고 있다. ‘프시케’에 대한 시적 명상의 초기인 1918년에서 1919년까지, 프시케는 관능적 욕망과 모성적 환상의 대상, 때로는 환멸과 공포의 대상으로 나타나며, 밤의 어두운 공간 안에서의 관능적 환상과 금지된 욕망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부각되고 있다. 1921년 몇 년의 공백 후에 시인이 “발걸음”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로 돌아왔을 때 “프시케”, “녹턴”에 이은 제목의 반전은 이 시의 생성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한다. 초기 판본들과는 상이한 이데올로기로 특징지어지는 결정판 텍스트에서 우리는 감각의 성향을 완화시키기 위한 시인의 부단한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밤의 환상을 대체하는 ‘불면’의 주제는 시를 관능적 충동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지적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전 텍스트로부터 이어받은 “벌거벗은 발”과 “입맞춤”의 “내민 입술” 속에 표현된 감각적 육체성은 ‘기다림의 순결함’과 “재능 don”의 주제에 의해 완화되어 있다. 밤의 환상과 의식의 갈등, 육체에 대한 욕망과 강박적 두려움 사이에 놓인 시인의 궁지는 시의 오랜 형성 과정에서 상반적 가치와 이미지들을 순화하고 통합함으로써 해소된다. ‘프시케’에 그 고유한 특질들을 간직하게 하면서도 시인은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도록 이 대상을 끊임없이 ‘재형상화’하면서 전 텍스트의 내적 균열과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적인 자신의 프시케를 발견해 낸다. 발레리에게 있어서 ‘프시케’의 재형상화 과정은 진정한 재능을 획득하기 위한 시적 모험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