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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시 세계, 특히 그의 후기시집인 『일뤼미나시옹』은, 파괴적이자 동시에 창조적이고, 분산적이자 통합적인 상호 모순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시어들과 그 시어들로 형성된 시 세계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특성들로 인해 끊임없이 서로 대립되면서도 역설적으로 역동적 힘에 의해 통합된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심력force centrifuge과 구심력force centripète이라는 상호 대립된 두 힘에 의해 각 시어의 이미지들은 부딪히며 충돌하고 서로 파괴하는 양상을 띠면서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역동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시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사실, 『일뤼미나시옹』이 보여주는 시 이미지들은 처음에는 견고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고,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다양한 시적 요소들로 구축된 시 세계는,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광경들, 결코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한 다른 시적 실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꽃놀이처럼 순간적이고 불안전하며 동시에 역동적이고 강렬한 효과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비록 시의 모든 요소들이 일종의 구심력에 의해 집중되고 압축되어 한순간 경이로운 시적 광경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랭보 시 세계의 한 특징인 개개의 이질적 요소들 상호간의 원심력 에 의해 이 공간은 끊임없이 분해되고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의 대부분 시의 경우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어느 한곳에 고착되지 않은 채 다양하게 변형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재창조되는 새로운 시 세계의 탄생을 목격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랭보의 시 세계는 부단한 생성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성, 변화 그리고 역동성은, 랭보가 자신의 시 세계를 그 자체로 궁극적 목표나 도달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행 passage’ 또는 과정의 단계로 간주하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