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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澄의 사상과 그 意義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활동했던 元代의 특수한 시대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元代는 이민족인 蒙古族이 漢族의 宋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최후까지 저항한 江南의 ‘南人’들을 차별 대우했다는 점 때문에 여타 王朝들과 달리 예외적으로 취급되어 왔으며 그만큼 학계 연구업적도 부진하였다. 이에는 중국인들의 中華主義에서 유래된 편견도 일조를 하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理學의 역사 속에서 보면 역설적이지만 宋亡과 元朝의 수립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흔히는 宋代가 理學이 성립, 발달한 시대로 알고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北宋代 王安石의 新法黨에 의한 탄압, 南宋代 韓侂冑에 의한 ‘僞學之禁’ 등 결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왔으며 南宋 末期 理宗代에 와서 반짝 官學으로 채택되었으나 그것도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元代에는 世祖의 ‘大有爲’와 ‘行漢法’의 시행을 지원하기 위한 王朝통치의 핵심이념으로 공인되고 理學者인 許衡은 파격적으로 重用되었다. 이는 漢 武帝의 儒敎의 國敎化 정책에 결국 뒤지지 않는 것이었으며 당시 朱子理學은 漢代 今文經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三統說, 大一統說을 수립하여 統一帝國體制로서의 漢 王朝의 통치이념을 수립했던 大儒 董仲舒가 民間의 이상주의자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일개 儒者로서 皇帝의 총애를 받은 許衡은 행운아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元朝의 理學에 대한 公認은 理學의 內在的 전개과정 속에서 볼 때 얻은 것 못지 않게 잃은 것도 생기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元 世祖가 理學을 채택한 것은 天下經營을 위한 政敎로서의 통치이념 上의 명분을 정하기 위한 이상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또한 이를 수행한 장본인인 許衡의 학술이란 고작해야 궁색한 南宋의 遺民 趙復으로부터 물려받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許衡 스스로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理學이란 『小學』과 『四書』에 입각한 ‘下達之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元朝가 받아들인 理學의 정체는 理學이란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國家 政敎로서의 전통적인 儒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여기에서 北宋代 이후 理氣說과 心性論에 의해 뒷받침되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서 발달한 理學이 지닌 內面主義와 자유로운 창조성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許衡과 동시대인 元代의 理學者 吳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吳澄은 宋亡 前夜에 江南의 撫州에서 출생하였는데 이 지역은 學術, 사상의 뿌리가 깊은 곳으로서 그 중에서도 陸象山의 고향이기도 하여 은연중에 陸學의 기풍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곳은 臨汝書院으로서 이 곳의 山長이었던 그의 스승 程若庸은 饒魯와 黃幹을 거쳐 朱子에 직접 닿는 學統을 지녔으므로 吳澄은 朱子의 四傳弟子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또한 그는 이 지역의 名士들이었던 湯千, 湯巾, 湯中, 湯漢 등 湯氏 門中의 학술적 영향을 받은 程紹開에게서 배웠는데 이들은 당대의 대표적인 陸學 혹은 朱陸折衷의 인물들이었다. 許衡과 비교하면 吳澄은 宋代 理學의 正統을 계승한 점에서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학술적 배경 속에서 吳澄이 그의 弟子인 虞集과 더불어 道統論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는 근거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이에는 元代 思想史의 正統性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學界에서 공통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 吳澄思想이 지닌 朱陸折衷의 경향이다. 이 점은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 고찰을 통해 살펴보겠지만 序說的인 수준에서 약간의 전망을 하면 다음과 같다. 吳澄의 학술, 사상은 그의 哲學體系와 經學 등 전반에 걸쳐서 볼 때 朱子理學이 주축이 되어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朱陸折衷의 경향은 朱子 이후 南宋 후기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던 일반적인 시대사조였다. 편협한 門戶之見에 사로잡힌 일부 제자들을 제외하면 眞德秀, 魏了翁 등 朱子 이후 理學 巨儒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吳澄의 心學의 뿌리는 周敦頤와 邵雍에 닿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朱陸折衷論의 意義는 오히려 ‘道問學’으로흘러 자칫하면 ‘下達之學’의 일상적 인륜규범의 형식주의로 전락되어 버릴 위험성이 있는 理學에 ‘尊德性’의 도덕적 내면주의가 지닌 진실성을 보강하여 理學의 內的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에 있었다. 즉 理學에 본래 內在되어 있던 내면주의와 心性論을 보조하기 위해 陸學의 새로운 수혈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기존의 학계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朱子學과 陸學의 대립 그리고 이후 明代에 와서 朱子學과 陽明學의 대립이라는 도식적 대립구도 속에서 南宋 이후 理學의 전개를 파악하는 시각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이 기회에 지적하고자 한다. 오히려 차후 吳澄과 元代 思想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이루어짐으로써 종전 明淸代의 사상사 연구가 지닌 문제점들이 시정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바이다.



學界共通的指摘是吳澄在學術上兼有朱陸兩家的學風。此點向後要深層硏究。但一此前望如下。 吳澄始終比較自覺地繼承和發展朱子的理學思想。不過他較小門戶之見, 不是株守一家之言, 而是兼取諸家之長, 以補朱子理學之短。他主觀上幷不是要和會朱陸, 而只是吸取陸學的某些合理因素, 以利于发展朱子理学。又我强调的是, 吳澄折衷朱陸因素已經形成南宋後期發現的時代思潮。一例是眞德秀,魏了翁等理學巨師的思想已有朱陸折衷因素。 吳澄心學的淵源是北宋代周敦頣和邵雍。吳澄繼承了周敦頣『太極圖說』與『通書』的影響。又邵雍是對吳澄影響最大的另一位學者。一般論著提到吳澄的心學理論來自陸象山, 我以爲吳澄的心學還有一個重要的來源, 那就是邵雍的心學。總述的結論是旣存學界的朱陸對立觀點是含有根本誤謬, 我希望此後發展硏究吳澄和元代思想, 以此幷是正從前理學史硏究的圖式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