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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총독부 일본인 司法官試補의 자격, 채용기준과 방식, 지원동기 및출신배경을,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편찬한『司法官試補進退書類(1928~1941년)』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처음으로 고찰한 글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사법관시보제도를 신설하였다. 사법관시보는 고등관인 주임관 대우를 받으며 1년 6개월의 실무수습을 마치고 실무시험을 거친 후 조선총독부 판검사 즉 사법관으로 임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부터 1944년까지 651명의 사법관시보를 채용하여 사법관의 공급원으로 삼았다. 이 가운데 일본인 사법관시보는 359명이었고, 조선인 사법관시보는 102명이었다. 즉 사법관시보의 신설로조선총독부는 독자적인 사법관 양성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매년 신규 사법관을 임용하였다. 1911年부터 1944年까지 새롭게임용된 일본인 사법관은 약 58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320명이 사법관시보 출신이었다. 또 시기별 신규 사법관의 임용추이를 보면, 1910년대와 1920년대는 일본 국내의 현직 사법관시보 혹은 판검사를 직접 수입하여 임용한 ‘수입형’ 사법관이 많았지만, 1930년대 이후는 1년 6개월의 수습과정을 통해 조선의 사정에 익숙한 사법관시보 즉 ‘재래형’ 사법관의 임용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독자적인사법관 양성 시스템이 이 시기에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양성된 이들이법원 내에 다수 포진함으로써 193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 사법부는 ‘在來型’ 사법관이 주도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관시보의 자격은 1923년까지는 제국대학 법과졸업자와 판검사등용시험 합격자이었고, 1924년부터는 고등시험(고등문관시험, 약칭 고문) 합격자만이 가질 수있었다. 다만 제국대학 법과졸업자 중 1923년도까지의 졸업자에 한해서 그 자격을인정하였다. 사법관시보의 채용은 신원조회 등의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면접은 일본 거주자는 조선총독부 東京出張所에서, 조선 거주자는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실시하였다. 채용 기준은 고문 성적, 출신학교와 성적 등도 고려했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상운동 관련여부였다. 비록 사법관시보에 채용되었더라도 사상운동에 관련된 사실이 확인되면 곧바로 발령을 취소하였다. 일본인이조선총독부 사법관시보에 지원한 동기는 개인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다양했지만,대체로 경제적 이유, 조선관련자(재조일본인 출신), 사법관 소신 지망 등이 가장 많았다. 일본인 사법관시보의 출신지는 비교적 각 현별로 골고루 분포하였는데, 東京·福岡·佐賀·山口등 도회적 성격이 강하고 교육문화가 진전된 大府縣의 출신자가많았다. 지역별로 보면 조선과 가까운 구주지역과 중국지역의 출신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족적을 통한 사법관시보의 신분구성을 볼 때 평민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사족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사법관시보의 출신학교는 제국대학 출신자가 121명, 사립대 및 기타 출신자가85명으로 정리되었다. 제국대학 출신자가 많았지만 사립대 출신자도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는 고문 행정과와 외교과의 경우 동경대 출신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사법과는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사법관시보의 출신학교를 제국대학과 사립대를 합쳐서 보면, 東京大-京都大-日本大-中央大순으로, 전체 일본인 사법과 합격자의 출신대학 분포와 대체로 비슷하였다. 일본인 사법관시보의 평균 고문 성적은 60% 내외였다. 이러한 수치만 가지고 생각할 때, 이들의 평균 성적으로는 일본 사법성에 취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本稿は朝鮮總督府における日本人の司法官試補の資格、採用基準と方式、志願動機及び出身背景を、朝鮮總督府法務局の編纂の『司法官試補進退書類(1928~1941年)』等の資料を活用して、はじめて考察した論文である。朝鮮總督府は、1913年、司法官試補制度を新設した。司法官試補は高等官である奏任官の待遇を受けながら1年6個月の實務修習を終わって、實務試驗を経た後、朝鮮總督府の判檢事、すなわち、司法官として任用された。朝鮮總督府は1913年から1944年まで、651名の司法官試補を採用して司法官の供給源にした。このうち、日本人の司法官試補は359名であり、朝鮮人の司法官試補は102名であった。朝鮮總督府は每年、新規司法官を任用した。1911年から1944年まで、新しく任用された日本人の司法官は約585名であったが、このうち、320名が司法官試補の出身であった。また、時期別の新規司法官の任用推移を察してみると、1910年代と1920年代は日本國內の現職司法官試補、あるいは、判檢事を直接輸入し、任用した「輸入型」司法官が多くなったが、1930年代の以降は、1年6個月の修習を通して朝鮮の事情に詳しい司法官試補、すなわち、「在來型」司法官の任用が大勢になった。司法官試補の資格は1923年までは帝國大學の法科卒業者と判檢事登用試驗の合格者であって、1924年からは高等試驗(高等文官試驗、略稱高文)の合格者だけが可能であった。ただ、帝國大學の法科卒業者中、1923年度までの卒業者に限って、その資格を認定した。司法官試補の採用は、身元照會などの書類審査と面接を通して行われた。面接は、日本居住者は朝鮮總督府の東京出張所で、朝鮮居住者は朝鮮總督府の法務局で實施した。採用基準は高文の成績、出身學校の成績等も考慮したが、もっとも重要な基準は思想運動の関連與否であった。たとえ司法官試補に採用されたとしても思想運動の関連した事實が確認されると直ちに發令を取り消しした。日本人が朝鮮總督府の司法官試補に志願する動機は、個人の事情によって多樣であったが、たいてい經濟的な理由、朝鮮関連者(在朝日本人出身)、司法官の所信の志望等が多かった。日本人の司法官試補の出身地は、わりに縣別にもれなく分布した。東京․福岡․佐賀․山口等、都會的な性格が强くて、敎育文化が進展した大きい府縣の出身者が多かった。地域別にみると、朝鮮と近い九州地域と中國地域の出身者が相對的に多かった。族籍を通した司法官試補の身分構成を察してみると、平民が壓倒的に多くて、士族は小數に過ぎなかった。司法官試補の出身學校は帝國大學の出身者が121名、私立大及び其他の出身者が85名であった。帝國大學の出身者が多かったが、私立大の出身者も少なくない比率であった。これは高文の行政科と外交科の場合、東京大の出身比率が壓倒的に高ったが、司法科は相對的に低かったのである。司法官試補の出身學校を帝國大學と私立大を合わせてみると、東京大-京都大-日本大-中央大の順で、全體日本人司法科の合格者の出身大學の分布とたいてい同じであった。日本人の司法官試補の平均高文成績は60%內外であった。このような數値だけで考えてみると、彼らの平均成績では日本の司法省に就職することはなかなかできなかったであろ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