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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출토 은합의 명문 내용에는 ‘延壽 元年’과 ‘辛卯年 三月’이라는 제작 시기와 제작 주체자로서의 ‘太王’이 남아 있다. 이에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었고, 그에 따라 논란은 분분해져 갔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기 연구 단계에는 ‘신라설’의 관점에서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가 조명되었다. 일본인 연구자들이 지증왕 12년(511)을 주목한 반면에, 이홍직‧박진욱 등은 눌지왕 35년(451)과 나물왕 35년(391)을 은합의 제작 시기로 보았다. 서봉총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는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 고구려산 청동합이 출토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그에 따라 ‘고구려설’의 관점에서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파악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통설이 되었다. 이들은 은합의 십자형 꼭지 손잡이 형태가 고구려 칠성산 96호분 출토 합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고, 간지의 표현방식과 손잡이 형태가 ‘고구려적 요소’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는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법흥왕대(514~540) 연호 제정 기록과 금석문상에서 신라 ‘太王’호의 성립 시기를 법흥왕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전제되었다. 그러나 호우총 청동합과 서봉총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관련짓기에는 재질(청동‧은)과 제작방식(주조‧단조), 그리고 명문의 새김방식(鑄出‧線刻) 등에서 양자 간 차이가 확연하다. 또한 칠성산 96호분 합과의 형태적 공유 측면과 간지의 표기방식이 ‘고구려적 요소’이더라도, 그것이 은합의 제작지를 고구려로 단정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신라와 고구려가 우호관계를 지속한 결과 고구려의 선진문물에 영향을 받은 신라 문물의 출토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는 아직까지 서봉총 은합과 같은 단조방식으로 제작된 합이 없고, 재질상 은합의 출토 사례도 없다. 신라사에서 ‘태왕’호를 사용한 시기도 현전하는 금석문상으로는 법흥왕 이후이지만, 지증왕이 재위 4년(503)에 ‘新羅國王’호를 칭한 것은 실질적으로 ‘太王’호의 의미와 부합한다. 또한 ‘建元’이 법흥왕대의 공식적 첫 연호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연수’를 지증왕의 逸年號로 이해하는 것과 상충하는 것만도 아니다. 서봉총 은합을 장수왕 39년(451)에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이후 신라 서봉총에 부장된 것으로 볼 경우 가장 큰 문제는 5세기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추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은합이 고구려 장수왕의 명령에 의해 451년 3월에 제작되었다면 그것이 신라로 전해져 무덤에 부장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두 나라의 관계상 고구려 문물이 신라 왕족 내지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묻힐 정도로 기념될 만한 부장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은합의 제작 주체와 제작 시기에 대한 연구방법으로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은합 자체의 재질과 제작방식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이 중요하다. 이에 주목되는 것이 박광열의 연구이다. 박광열은 서봉총 은합과 같은 십자형 꼭지 손잡이 형식이 출토된 7개의 합의 제작기법(주조 ․ 단조), 합에 뚜껑을 덮는 방식, 재질, 십자형 꼭지 손잡이 부착 방법, 뚜껑과 합의 높이 ․ 크기와 구경비율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서봉총 출토 은합의 제작 주체와 시기를 지증왕 12년(511)으로 파악하였다. 현단계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이해방향으로 생각된다. 은합의 年干支를 뚜껑 안쪽과 합의 밑바닥에 나누어 표기한 것도 제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곧 ‘太歲在辛’과 ‘太歲在卯’ 각각의 의미를 추적한 결과, 은합의 제작 주체인 ‘太王’의 聖德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것의 전제적 조건인 장수를 함께 염원하는 측면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延壽’라는 연호는 도교에서 추구하는 불로장생의 표현인 ‘延年益壽’의 줄임말일 가능성이 크고, 은으로 그릇을 제작한 것도 도교적 산물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The Silver Bowl with Lid excavated from the Seobong-chong(瑞鳳塚) beared an inscription that ‘The First Year of Yeon su(延壽, the name of an era reign name)’ and ‘Taewang(太王)’. It Means that Production period and Production entities of the Silver Bowl. The Research result accumulated about a Production period and Entities of the Silver Bowl. First, The Production entities of the Silver Bowl King of Goguryeo a view that to see. In This case,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Silver Bowl understood that King Gogukyang 8 years(A.D. 391) or King Jangsu 39 years(A.D. 451). Second, The Production entities of the Silver Bowl King of Silla a view that to see. In This case,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Silver Bowl understood that King Nulji 35(A.D. 451) or King Jijeung 12(A.D. 511). Beyond that,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Silver Bowl understood that King Jinpyeong(r.579~632). In this instance, ‘Yeon su’ understood that the name of chronicle age of Gochangguk(高昌國). As a result of formal classification if the Silver Bowl with Lid excavated from the Seobong-chong was made to pray Longevity of the King Jijeung(r.500~514) 12 years(A.D. 511). I think that ‘Yeon su’(延壽, the name of an era reign name) short for prolong life(延年益壽) of Tao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