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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明治十一年代理公使渡韓始末』과 『明治十二年代理公使朝鮮事務始末』을 이용하여 1878~1879년 사이에 두모진 수세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이 벌인 교섭의 내용을 검토한 것이다. 첫째, 1878년 조선정부가 부산의 두모진에서 수세를 실시한 것은 의주부 상인들의 수세에 대한 형평성의 문제제기와 재정확보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조선정부의 수세는 개항 이전 동래부나 의주부를 통해서 들어오는 각종 화물에 부과하던 세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수세관행과 인식이 개항 이후에도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둘째, 두모진 수세 문제의 후속교섭으로 1879년에 조선과 일본이 벌인 교섭의 내용과 전개과정을 사안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일본 측은 조선에 진출한 자국 상인들의 요구안을 반영하면서 협상 안건을 다각화하여 조선 내부로 침투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음을 검토하였다. 반면에 조선정부는 1년 전의 교섭 경험에 비추어 더 이상 기존의 관행만으로 대응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세칙의 협정, 범죄인의 인도 요구 등은 그러한 점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게다가 조선 측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리훙장의 권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진행해 온 일본과의 교섭을 통해서 도출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검토 작업을 통해서 개항 이후 조선과 일본 측이 각각 가지고 있던 인식과 대응논리의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요컨대 근대적 조약체제 안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조선 측의 상황 인식과 내적인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두모진 수세에 대한 조일 양국의 교섭이었다.



この論文は『明治十一年代理公使渡韓始末』と『明治十二年代理公使朝鮮事務始末』を基本資料として1878年から1879年まで釜山の豆毛鎭で收稅の実施をめぐって朝鮮政府と日本政府が行った交涉の展開過程を検討したものである。殊に豆毛鎭で收稅が発生した理由として開港以降改編されていた朝鮮の貿易構造に注目しながら、東萊府と義州府の間でこの変化がどのような影響を及ぼしたのかを上記の資料に基づいて検討した。第一、1878年の時点で朝鮮政府が豆毛鎭で朝鮮商人に対してのみ收稅を実施したのは義州府商人達の收稅に関する衡平性の問題提起と東萊府の不足する財政を補充するため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朝鮮政府の收稅は開港以前の時、東萊府や義州府を通じて入って来た様々な貨物に科した税金と比べれば大きな相違がなかった。この点は朝鮮後期の收稅慣行と認識が開港以降にも強く影響を及んでいたことをよく示している。第二、豆毛鎭の收稅問題の後属交涉で1879年に朝鮮と日本が行った協商の具体的な内容と展開過程を事案別に分けて分析した。この作業を通じて日本の方は朝鮮へ進出しようとする自国商人達の申し出に基づいて協商の進行方向を多樣にしながら、朝鮮内部へ浸透するきっかけを作り出したことを確認した。一方、朝鮮政府は昨年の交涉経験に照らして、すでに既存の慣行だけをもって対応できないことに気付き、日本に対して自分の要求事項を積極的に申し出した。税則の設定、犯罪者の引導要求等はそれらをよく示している。それ故に朝鮮のこのような変化は単に李鴻章の勸告によって行われたものではなく、それ以前から展開されてきた日本との交涉経験を通じて自然に出たものであったことは注目すべきである。豆毛鎭の收稅問題をめぐって進めれた朝日両国の協商過程について検討した結果、開港以降の朝鮮と日本がそれぞれ持っていた認識と対応論理の変化様相を具体的に究明することが出来た。まさに近代的な条約体制の中に組み込まれたばかりの朝鮮の狀況認識と内的変化の様子をよく示すものが、豆毛鎭の收稅において朝日の間で行われた交涉である。しかし1880年代に入ると朝鮮政府は以前よりも厳しい国際的状況に置かれることになる。米国をはじめとする様々な欧米の国々と通商条約を締結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だ。さらに壬午軍乱や甲申政変等、政治的に波及効果の多かった事件が続いて起こったことは、朝鮮が活動する余地を狭め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