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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메이지 초년에 일어난 보신(戊辰)전쟁의 하나였던 도호쿠(東北) 전쟁의 전후처리과정에서 메이지 신정부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보여준 정치적 노력을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朝敵’아이즈번(會津藩) 등에 대한 토벌을 강행하는 신정부측과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오우에쓰(奧羽越) 열번동맹측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보신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도호쿠 전쟁을 신정부의 장래를 좌우하는 ‘대전쟁’으로 간주한 바 있었던 기도는 조기 평정을 위해 스스로 관군 응원 차 간토(關東)・호쿠에쓰(北越) 출장을 청원하거나, 전쟁을 진두지휘한 동향 조슈(長州) 출신의 정치적 맹우 오무라의 협조를 받아 관군 증원출병・군수품 조달을 위한 군함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한편 도호쿠 평정을 눈앞에 두고 대두된 항복 諸藩에 대한 원칙 없는 ‘유화론’을 비판한 기도는 도호쿠 전쟁 조기평정 후의 제번처리 초안을 마련해 정부에 건의하고, 그 결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즉 ‘조적’아이즈번을 도호쿠 전쟁 발단의 원인 제공자로 중죄에 해당함을 분명하게 지적한 후에 천황의 재단에 의해 관대한 처분이 내려질 것임을 전망하면서도, 죄의 경중에 따라 아이즈번과 기타 제번의 처분 기준을 달리하여 어디까지나 전후처분이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도의 주장 이면에는 군신관계를 저버린 ‘반역’행동이 중죄임을 분명히 적시한 후에 적대 정도에 따라 ‘형률’을 차등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조기에 신정부의 권위와 국가기강의 확립이라는 ‘大政一新’의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한동안 도호쿠 항복제번처분을 둘러싼 신정부내의 의견 대립과 함께 에노모토 다케아키 지휘하의 반정부 탈주 군함의 하코다테 점령대책 마련 등으로 인해 지지부진했던 제번처분 심의는 明治 원년 12월에 들어와 최종 단계를 맞이했다. 즉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참가한 제번과 아이즈・쇼나이 동맹 가운데, 신정부에 끝까지 저항한 19번이 각각 滅藩, 영지 몰수・번주 교체 후의 減封・도쿄 근신처분, 번주 교체와 減封, 減轉封 등의 차별적인 처분을 받았다. 또한 제번처분이 최종 국면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기도는 도호쿠 전쟁 전후처리의 일환으로서 도호쿠 지방을 재편하려는 구상을 병행 추진하고 있었다. 도호쿠 지역의 府縣制 실시와 천황의 도호쿠 민중에 대한 ‘敎化’와 ‘撫育’를 쉽게 하기 위한 제번 민정처리의 차원에서 도호쿠 지역을 7개 지방으로 나누는 분할안을 건의해 정부 논의를 거쳐 승인받았다. 이 행정 분할은 현재의 도호쿠 지방 6縣의 효시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상기의 도호쿠 전쟁 전후처리(항복제번 처분・행정 분할)과정에 있어서의 기도의 정치적 노력에 대해 신정부내에서 조슈를 대표해 온 기도와 함께 정치적으로 때로는 대립하거나 협조관계에 있었던 사쓰마를 상징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도 서한을 보내 이를 인정하고 있었음은 기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本稿は、明治初年に起こった戊辰戦争の一つである東北戦争の戦後処理過程で、明治新政府の指導者である木戸孝允が行なった政治的努力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東北戦争を新政府の将来を左右する ‘大戦争’であると見做した木戸は、関東・北越出張の請願、官軍の増員出兵・軍需品調達目的の軍艦確保など、早期平定のため尽力した。 東北平定を目の前において現われた降伏諸藩に対する軽はずみな宥和論を批判した木戸は、平定後の諸藩処理案を政府に提出し、その採択のため積極的に動いた。すなわち、 ‘朝敵’会津藩を東北戦争発端の原因提供者で重罪に当てはまることを指摘した上、天皇の裁断で寛大な処分が下されることを見込みつつも、罪の軽重により会津藩とその他の小藩の処分基準を異にして戦後処分がどこまでも公明正大に行われるべきことを強調した。こうした木戸の主張の裏面には、君臣関係を見捨てた ‘反逆’行動が重罪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摘示した後に、敵対程度により ‘刑律’を差等的に適用することにより、早期に新政府の権威と国家紀綱の確立という、いわば ‘大政一新’の政治的効果を期待し得る認識が働いたと思われる。 一方、降伏諸藩処理をめぐる新政府内の意見対立(寛大論/厳罰論)に続いて、榎本武揚指揮下の脱走軍艦の箱館占領対策などに追われ進まなかった諸藩処分審議は、明治元年12月に入り最終段階を迎えた。すなわち、奥羽越列藩同盟に参加した諸藩と会津・庄内同盟の中で、新政府に抵抗し続けた19藩が各々滅藩、領地沒收・藩主交替後の減封・東京謹慎処分、藩主交替・減封、減転封などの差別的な処分を受けた。なお、降伏諸藩処分が最終局面を迎えている頃、木戸は東北戦争の戦後処理の一環として東北地方を再編しようとする構想を同時に推進していた。平定したばかりの東北地域における府県制の実施と天皇の東北民衆に向かっての ‘教化’・ ‘撫育’を施すための民政安定の次元で、東北地域を7つの地方に分ける分割案を建議して承認された。この行政分割は現在の東北地方6県の嚆矢で、その歴史的意味は大きい。 上記の東北戦争戦後処理(降伏諸藩処分・行政分割)過程における木戸の政治的努力について、新政府内で、長州藩を代表する木戸と共に、政治的に時には対立したり協調関係にもあった薩摩藩を象徴する人物の一人である大久保利通も木戸宛の書簡で、その尽力を認めていることは木戸の政治的努力がむなしくなかったことを物語っていると思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