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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일본관계의 교류상의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違例와 無禮와 같은 명분론적인 외교의례와 年期違犯이라 하여 발해사의 年期문제이다. 양국관계는 이를 일본측이 제기하고 발해가 대응하는 가운데 전개된다. 8세기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소중화의식으로서 한반도제국을 일본의 번국으로, 그 사절단을 번국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는 일본을 동등하게 때로는 舅甥관계, 형제관계를 내세우며 우월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중화주의의 충돌로서 발해와 일본이 상대를 보는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발해에 대한 인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패망 전후의 일본에 온 고구려사, 그 후 고구려유민으로 성립한 보덕국의 사절, 일본천황의 신분적 질서하에 포섭되는 고구려유민의 존재가 있었다.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의 발해의 일본에 대한 강한 메시지는 자연히 고구려와 발해가 중첩되면서 일본으로 하여금 발해와 발해사를 번국, 번국사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발해는 천손으로서의 왕권의 자부심을 과시하며 수없는 「無禮」를 반복하였다. 국서의 표기문제가 매번 지적되었지만 발해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商旅’인식에서 나타나듯이 발해는 교역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빈번히 내항하였다. 발해인의 눈에 비친 일본은 거대한 교역시장이었다. 일본측에서는 신라와의 공적관계가 단절되고 견당사가 종료되는 9세기 이후가 되면 발해는 유일한 통교국이자 문물수입처였다. 양국은 상호인식의 차이, 외교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장년의 교류가 중단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부적 조건과 국제적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경계한다는 공동의 인식이 있었고, 특히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쟁의식은 너무도 커 발해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왕권내부의 주요 과제였다.



渤海と日本關係の交流上の爭點になったのは、‘違例’と‘無禮’という名分論的な外交儀禮と年期問題であった。兩國關係は、これを日本側が提起して渤海が對應する形に展開される。8世紀の日本は天皇制律令國家を完成とともに、小中華意識をもって韓半島諸國を日本の蕃國に位置づけていた。しかし、渤海は日本にたいして時には舅甥關係、兄弟關係を主張しながら優越さを見せている。これは両国の中華主義の衝突で、渤海と日本が相手をみる認識の違いである。日本の対渤海蕃國觀の要因は、敗亡前後の高句麗に対する認識と日本天皇の身分的秩序下に包攝される高句麗遺民の存在である。高句麗の繼承国としての渤海の日本に対する強いメッセジは、高句麗た渤海が重なりながら、自然に日本の対渤海蕃國観を形成す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日本の期待とは違って、渤海は天孫としての王權の自負心を誇示して絶えずに‘無禮’を繰り返した。日本側の國書の表記問題は常に指摘されたが、渤海の立場は変わってなかった。‘商旅’認識で見られるように、渤海は交易の利益をとるため、たびたび內港した。渤海人の 目に映った日本は、巨大な交易市長であった。日本側では新羅との公的關係が斷絶され、遣唐使が終了される9世紀以後になると、渤海は唯一の通交國であった。兩國は相好認識の差異, 外交的な摩擦にも関わらず、長年の交流が続けられたのは、相手を必要にする内部的條件と國際的環境があったからである。渤海と日本は新羅を警戒するという共同の認識があって、特に日本の新羅に対する競爭意識はあまりにも大きくて、渤海との協力關係を構築することは王權内部の主要な課題であ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