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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현대는 각종 국토개발로 인한 지명 수난 시대 오늘날 도처에서 산업입지, 택지개발, 도로, 공항 등 대규모 개발사업이 끊임없이 시행되고 있다. 심지어는 산꼭대기에 양수발전을 위한 저수시설 공사가 시행된다든지, 내륙 오지에 댐이 축조되어 어느 날 갑자기 내수면 어업이 성행하게 된다든지, 바다위로 다리가 건설된다든지, 그 개발의 실례는 우리가 상상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개발이 진행되면서 개발지역내의 현지 주민이 집단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럴 경우에 토착지명의 90%가 소멸되는 것은 자명한 현상이다. 과거에 개발되었던 소양강댐 수몰지역이나, 섬진강 댐 수몰지역 등 서울 여의도 면적의 몇 천 배에 달하는 지역에서 제대로 지명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국토개발이 전국의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조국 근대화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명조사에 관한 어떤 체계적인 정부의 지침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로 인하여 소멸된 지명의 수효는 어림잡아 30만개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도록 방관한 정부의 잘못된 제도와, 학계의 무관심,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지명조사의 법제화(측량법의 개정에 의한 국토개발 지역내 사전 지명조사의 제도화)를 강조하여 왔고, 신문. 잡지 등 각종 기고시 마다 지명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사유와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안한 바 있다. 특히 2000년도에는 한국지명학회의 당시 이돈주 회장님을 모시고 건설교통부 김윤기장관(당시)을 방문하여 그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한편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화 방안 등을 분야별로 제안한 바 있으나 아직도 그 실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필자는 관계공무원이나 출입기자 등 그들과 쉽게 지명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또 지명의 중요성을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서, 예언성을 지닌 지명을 틈틈이 소개하고 또 이를 재미있게 연재함으로서 그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고자 노력하여 왔다. 이러한 노력은 그 성과가 눈에 뜨일 만큼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각종 연재물이나 월간지 등을 통하여 이를 꾸준히 발굴․소개함으로서, 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언성 지명을 소개함에 있어서도, 원래의 지명이 지닌 뜻이나 유래, 어원 등을 가능한 밝히면서 餘談의 형식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나. 우리가 구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해 지명우합, 곧 지명의 예언성(필자는 이것을 지명의 通時性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에 관하여 그 인과관계가 구명되지 못한 사례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본 고에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전남 여수시 소라면 현천리 쌍둥이마을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이미 세계 최고의 쌍둥이마을로 기네스 북에 올라서 그 인증서를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거니와, 이 마을과 쌍봉산과의 관계는 여러 연구기관에서 구명해보려고 하여도 아직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옛말의 「명실상부(名實相符)」라든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든지, 이런 말을 떠올리게 하는 사례가 많이 있음에도 그 원인을 밝힐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옛 사람들은 이를 「지참(地讖)」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였던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필자의 우매한 소견인지는 몰라도, 땅은 사람의 삶을 감싸고 있는 환경이며, 그 땅과 사람의 인연으로 인하여 사람은 땅에, 땅은 사람에 오래 오래 서로 길들여져 왔다고 생각한다. 그 땅에 그 주민이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서로 닮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하여 그 땅과 사람의 관계에서 「人傑은 地靈」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며, 「지인상득(地人相得)」이니 「지인합일(地人合一)」이니 하는 말들이 생겨났다고 본다. 문제는 예언성을 지닌 지명에 대하여, 이것을 굳이 「地名 偶合」(우연성을 강조)으로 못박지 말자는 점이다. 어떤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그것의 필연성을 밝히지 못한다고 하여, 꼭 그것을 우연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스스로 우리의 상상력을 지워 버리는 결과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는 인간이 구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인간이 구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 맥락에서 「지명의 예언성」을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미완의 장, 여백의 장으로 남겨둔 채 애정을 갖고 더 주시하며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