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열기/닫기 버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1952년 이후 세계교회에 처음 등장한 후, 한국은 1969년 1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제2차 총회를 “오늘의 한국에 있어서의 Missio Dei”라는 주제로 열면서 공교회의 협의체에 의해 정식으로 도입하였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먼저는 NCCK회원 교단들이 주축이 된 도시산업선교(UIM)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UIM이 Missio Dei의 배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편, 1960년대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노동환경의 변화, 그에 따른 성장위주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선교적 대응으로서 Missio Dei를 현재적 종말론적 시각에서 수용한 것이고 다른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과거와는 달라진 한국적 상황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이것을 선교적 과제로 수용한 한국교회의 자의식과 신학적 발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1960년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정치적 참여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한국교회에는 물론 한국역사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의식에서 교회는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NCCK 회원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러한 노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이 교회 안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세계역사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됨으로써 Missio Dei신학을 공교회가 받아들이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끝으로 토착화논의이다. 그 주요 쟁점은 성서전통과 한국문화전통과의 연결성이다. 서남동은 기독교역사의 민중전승과 한국의 일반역사의 민중전승의 두 백성 모두 고난의 역사로 보고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기독교와 한국의 두 민중전승이 Missio Dei 안에서 합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통문화와 종교와의 대화는 토착화논의의 중요한 주제이며, 1963년 Mexico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의 쟁점이었다. 결국 한국교회의 토착화 논의에는 Missio Dei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Missio Dei’ 이해에는 중대한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었다. 1976년 한국신학연구소의 심포지엄에서 ‘Missio Dei’를 지지하는 심일섭과 비판하는 김명혁이 각각 주제를 발표하면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 이들은 Missio Dei란 말을 공적으로 처음 사용한 때가 1952 ‘윌링엔’대회이며 ‘호켄다이크’가 주장하였다고 하였으나 대회의 공식보고서나 대회기간 중에 사용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Missio Dei는 후켄다이크가 아니라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감독 하르텐슈타인이 처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NCCK가 Missio Dei를 공식 수용한 총회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반응은 거의 없었으나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보수적인 교회들의 비판은 매우 강하였다. 대표적으로 1975 서울에서 개최된 The evangelical Conference for Missio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social-political oriented Missio Dei”에 대항하여 구속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에 근거한 “Missio Christi”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82년 채택된 “The Seoul Declaration: Toward an Evangelical Theology for the Third World”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서구신학을 비판하면서 고난당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해석학을 찾고자 시도하였고, 그 결과 Missio Dei를 선언문에서 고백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Missio Dei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과제는 Missio Dei를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단초로 삼는 것과 ‘Missio Dei’를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 활용하는 것 그리고 ‘Missio Dei’를 성령론적 관점에서 발전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