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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年の敗戦後、戦争への反省と新たな民主主義の再建に向けて広範な民衆による戦後革命が日本で開始された。これは一言で共産党主導と今日では要約されているが、その実体は共産党とは無関係な下からの運動であった。戦後直後から少人数によるグループを作り、サークル運動と呼ばれる運動が全国で展開していった。そこで多くの民衆は詩を作り、美術に親しんでいった。しかしその動きは冷戦の開始と共に徹底的な弾圧にあった。主体的に参加したものにとってそれは敗戦に次ぐ、二度目の敗北であった。しかしその敗北は戦後史において敗北とは自覚されていない。しかしそれは正確に二度目の敗北なのだろうか。アジア․太平洋戦争中、日本は総力戦のさなかにあって、あらゆる層の国民は戦争に巻き込まれていき、芸術家も例外ではなかった。画家たちは戦争を描き、賛美する戦争画を描いた。そのことは芸術の敗北に他ならない。戦後直後の状況をアヴァンギャルドの画家として生きた画家桂川寛にとって戦後革命とは、画家として新たな日本を描くことであり、同時に戦争中に敗北した絵画的抵抗を新たな革命という戦争状態の中で継続し、遂行することでもあった。彼は戦時中に画家たちが成し得なかった抵抗を10年遅れで果たそうと試みたのであった。しかしこの二度目の抵抗も弾圧により抑圧され、歴史の闇へと消えていった。しかもこの忘却は単に権力による弾圧によるものだけではなく、進歩勢力によっても否定され、軽蔑にさらされた。その結果、彼らの経験は今日まで省みられることはなかった。この忘れられた歴史を桂川寛の軌跡と作品に結実している二つの抵抗と挫折の過程を通じて探る。そして2011年の原発事故で三度目の敗北を迎えた日本へのヒントを探ってみる。真の抵抗の可能性はこの敗北の自覚の深さにかかっているのである。



1945년 패전 이후, 전쟁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민주주의 재건을 향해 민중에 의한 광범한 전후혁명이 일본에서 개시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공산당주도’라는 한마디로 요약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체는 공산당과는 무관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었다. 전후 직후부터 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이 조직되었으며, 서클운동이라 불리는 운동이 전국에서 전개되어 갔다. 그로써 많은 민중들은 시를 짓고, 미술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냉전의 개시와 함께 철저히 탄압받게 된다. 주체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패전에 버금가는 두 번째의 패배였다. 하지만 그 패배는 전후사에 있어 패배라 자각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정확히 두 번째의 패배인 것일까. 태평양전쟁 중, 일본은 한창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모든 층의 국민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예술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화가들은 전쟁을 그리고, 찬미하는 전쟁화를 그렸다. 이는 곧 예술의 패배라 할 수 있다. 전후 직후의 상황을 아방가르드 화가로서 살았던 카츠라가와 히로시(桂川寛)에게 전후혁명이란, 화가로서 새로운 일본을 그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전쟁 중에 패배했던 회화적 저항을 새로운 혁명이라는 전쟁상태 속에 지속시키며, 수행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전시 중에 화가들이 이룰 수 없었던 저항을 10년 늦게나마 이루어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저항도 탄압에 의해 억압되어,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게다가 이 저항은 단지 권력에 의한 탄압으로 인해 망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보세력에게마저 부정되었고 심지어 경멸당했다. 그 결과, 그들의 경험을 오늘날까지 되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망각된 역사를 카츠라가와 히로시의 궤적과 작품으로 결실을 맺은 두 개의 저항과 좌절의 과정을 통해 살펴본다. 그리고 2011년의 원자력발전소 사고에서 세 번째의 패배를 맞은 일본에 대한 힌트를 탐색해 본다. 진정한 저항의 가능성은 이 패배의 자각에 대한 탐색에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