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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子曰: "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亡也。" 공자가 이르시기를: “오랑캐 지역의 군주가 있음은, 중국 본토 지역의 (군주가) 없음만 못하다.” 《論語(논어)》 <八佾(팔일)> 이는 예악제도가 임금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오랑캐 지역에서 임금을 세워 따르더라도 그들에게는 예악제도가 없기 때문에 나라가 바로 잡힐 수 없지만, 중국 中夏 지역은 예악제도가 있기 때문에 설령 임금이 없더라도 나라가 바로 잡힐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악제도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니, 예악제도는 즉 정치를 위한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이상향을 추구하였기에, 이처럼 예악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左傳(좌전)》 <昭公(소공) 7년>과 《史記(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따르면, 孟僖子(맹희자)가 병이 들었을 때 공자를 達人(달인)이라고 칭찬하며, 그의 아들 孟懿子(맹의자) 즉 仲孫何忌(중손하기)와 南宮敬叔(남궁경숙)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자가 되라고 유언했다. 이에 이 둘은 공자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가 공자 나이 17세였다. 따라서 공자는 그 이전에 이미 道(도)에 뜻을 두고 배웠던 것이다. 《史記(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南宮敬叔(남궁경숙)과 함께 周(주)나라에 가서 老子(노자)를 만나 큰 깨달음을 얻었고, 주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맹희자가 죽고 나서 3년의 부친상을 지낸 후에야 남궁경숙이 공자와 같이 갈 수 있었으므로, 최소한 공자 나이 20세 이후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과연 노자를 만나서 禮(예)를 배웠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들이 다분히 있는데, 《禮記(예기)》 <曾子問(증자문)>에서 공자는 8차례에 걸쳐서 老聃(노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이제 다음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공자가 말하는 노담이 바로 노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Since the duke of dynasty Zhou complete to system, Confucius has been revered and claims should carry out a system of rites and music. As is known to all, The analects of Confucius is a record of words and deeds of Confucius's works. It mainly discusses about what kind of mentality and action should have as a leader. And it also emphasizes the role of ritual and music everywhere. In other words, ritual and music contains the strong political meaning in the minds of Confucius. This paper discusses about the definition of ritual and music at first, the next review there is what kind of logical relationship between ritual and music, In the final analysis out there are what kind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usic and poli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