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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 육군강무학교는 “雲南武校”, 또는 “雲南講武堂”이라고도 칭해졌는데, 교지는 中國 雲南省의 省都인 昆明에 있었다. 1904년 신군의 普鍊과 더불어 청 조정은 각 성에 군사학당을 설치하였다. 정규 군사학당의 교육은 크게 陸軍小學堂 - 陸軍中學堂 - 陸軍兵官學堂 - 陸軍大學堂 4級으로 나누어진다. 청조에서 신군 編練을 전후하여 운남에서도 많은 중하급 군관이 필요했으므로 군사학당을 설립하게 된다. 이를테면 武備學堂(1899년), 新操學堂(1901년), 陸軍小學堂(1906년), 陸軍速成學堂(1906년), 軍醫學堂(1909년) 등이다. 운남육군강무학교는 1909년 9월 28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여 기구를 조직하고 章程을 제정하였으며 교재를 만들어 1917년부터 1918년 2월에 제11기, 제12기를 모집하였다. 마침 운남강무당이 다시 창립될 때 일본 육군학교 제6기 중국 유학생이 졸업하고 귀국하는 즈음이었다. 그래서 운남 당국은 일본에서 귀국하는 유학생을 교관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일본에서 손중산 선생이 영도하는 同盟會에 참가했었던 인물들이다. 운남육군강무학교는 민국 17년까지 총 19期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민국 18년에 전국이 통일되면서 군사교육이 중앙으로 귀속되었다. 1934년 장개석이 군사 교육의 통일을 위해 강무학교의 옛 터에 “中央陸軍軍官學校昆明分校”를 개설하고, 1935년 8월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1937년에 또 “中央陸軍軍官學校第五分校”(黃埔五分校라고도 칭해짐)로 개칭하였다. 5분교는 총 20기를 모집하였으며 1945년 9월에 중단되었다. 본고에서는 그동안 학자들이 많이 활용하지 못했던 운남성과 곤명시 당안관과 운남성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운남강무학교의 『동학록』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한국인 유학생의 수학 여부를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동학록』이란 졸업 후에 곤명에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지면서 작성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韓籍의 학생들이 졸업후 곤명을 떠난 다음 동창생들과 연락이 없을 경우는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록』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운남육군강무당에서 수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육군강무당 『동학록』은 11, 12, 13, 14, 15, 16, 17, 18, 19가 현존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한인 유학생의 성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6기부터이다. 본고에서 『동학록』이나 졸업생들의 저서나 증언을 통해 육군강무당 수학이 확인된 학생은 13명이다.(운남항공학교에 재학하였던 3명을 포함하면 16명) 그리고 직·간접적인 기록에 의해 확인되어야 할 학생으로는 15기의 30명과 16, 17, 18기의 27명이 있다. 운남 강무당의 재학이 확인된 인원이든 아직 확정할 수 없는 학생들이건 간에 중요한 사실은 한국국적의 학생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거의 대부분이 상해 프랑스 조계의 주소를 사용하였고, 길림、 북경、 복건、 영파、 상해、 광동、 남경 등의 인물로 위장하였다는 것이다. 한인 학생들이 중국에서도 서남 변방에 위치한 운남육군강무학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당시 강무당이 군사학교로서 갖는 전통과 우수한 교수진, 특히 중국측 인사들과의 친분관계(특히 당계요)에 의해서였다. 운남무관학교를 졸업한 한인 유학생들은 중국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지기도 하고 상해와 만주 노령 지역에서 항일 전선을 전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