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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민들이 표착되고 송환되는 지역으로는 중국의 명주, 한반도의 탐라, 일본의 대마도가 대표적이었다. 송인의 고려나 일본의 표류는 현저히 적었으나 고려인과 일본인의 중국 표류, 일본인의 고려(탐라) 표류, 고려인의 일본 표류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인다. 본고에서는 세 지역(명주· 탐라·대마도)에서 발생한 표류민과 이들의 조처와 송환에 주목해 보았다. 중국에서 고려의 표류민을 송환해 오는 시기는 대체로 5월에서 8월에 이르는 시기로 계절풍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는 당시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에서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염원이 강하여 특히 고려의 표류민을 대우하고 송환하는데 성의를 보였다. 물론 송나라는 당시 국제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간첩으로 위장한 가짜 표류민이 있을까 신경을 썼지만 표류된 것으로 밝혀지면 잘 대우하여 송상이 무역하러 가는 때에 귀국하게 하거나 표류민 본국의 사절단이나 상선이 올 때 돌려보냈다. 고려민의 표류에서 두드러진 양상은 탐라지역 출신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고려내의 이동에서 뜻하지 않게 중국으로 표류되기도 했겠지만, 바다 한 가운데 있는 탐라 지역 사람들은 밖으로 진출할 필요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에서 직접 선진 문물을 흡수하는데 유리한 면도 있었다.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민간교류가 이루어진 후, 어떻게 보면 탐라지역은 지리적으로 중간 거점지역이 되었다. 일본에 표착한 고려의 표류민은 대마도의 관료를 통해 송환해 오는 성의를 보였다. 이는 대마도의 경제가 고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고 대마도와 한반도는 거리상으로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반면, 탐라 지역에서는 일본의 표류민에 대한 약탈이나 만행이 있어 관료가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세 동아 해역에서의 교류는 공식적인 표류민 송환제도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나름대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표류민들과 현지 관료나 주민간의 교류는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였으므로 한자의 인식 능력을 통해 동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상대 국가가 자국과 어떠한 정치· 외교관계에 있는지에 따라 대우하는 정도가 달랐다. 또한 송환시에도 당사국과의 관계 여하에 따라 송환 절차가 결정되었다.



由於陸路交通先後為遼和金所阻隔,高麗與宋之間的往來,不得不主要依靠海上的交通。宋代是海外貿易活躍的時期,形成了一個巨大的商業網絡。宋商進出高麗或者日本,高麗人與日本人也通過各種方式(譬如使臣來往,商人貿易,佛教交流等)來往中國。元豐以後,宋代確定東南的明州為對高麗和日本通航的唯一港口,明州港因此成為了宋對外貿易的中心。宋代東亞三國的貿易和友好交流中,常常出現因無法抗拒的自然原因而發生的非法漂流停滯異國,三國送還漂流人員的重要地點有中國的明州,韓半島的耽羅,日本的對馬島。宋人漂流到高麗、日本極少,而高麗人與日本人漂流到中國、日本人漂流到高麗(耽羅)、高麗人漂流到日本則相對多一些。這可能與當時宋人對季節風與海潮規律的認識有直接關係。我分析了從三國的文獻中找出的中世期東亞海域上發生的各國漂流民的大量資料,結果如下:漂流民的類型主要有使臣、居民(包括商人)、僧人、軍人等;宋初高麗使臣的漂流時間大部分在9月份;宋朝送還高麗漂流民的時間大約在5月份到8月份之間,他們利用季節風來送還漂流民。宋朝認為,當時國際情況不穩定,有必要維持跟高麗的友好關係,故宋朝對漂流民給予了很好的待遇適妥善安排送還。當然,宋朝亦擔心偽裝成間諜的假高麗漂流民,所以往往會先查明漂流民的身份,之後再幫助他們回國。宋朝對高麗漂流民的送還主要採取兩種方法。一是由前往高麗的宋商帶回,二是由本國的使節送還。漂流到中國的高麗民大多出自耽羅,這在客觀上使耽羅成為高麗吸收中國先進文物的重要地區。日本與宋朝雖沒有正式的官方交流,但兩國之間民間文化交流卻極為頻繁,比如日本僧侶便常常去宋朝江南名剎學習禪宗。由於地緣因素,耽羅也成為宋朝與日本來往的中轉地區。漂流到日本各地的高麗人,經由對馬島送還高麗。其路線是由日本各地到大宰府,再由太宰府到對馬島,再由對馬島到金州和東南海船兵部。這是因為對馬島的經濟主要依託高麗,並且與韓半島距離較近。在中世東亞海域上,正式的漂流民送還制度形成以前,各國之間已經形成了友好的文化交流。北宋嘉祐年間,耽羅人漂流到蘇州崑山縣后,從中國學習新的造船技術,同時也將耽羅的農產品傳到了中國。四百年后,在濟州當過官的崔溥,不幸漂流到中國。當中國人得知他來自濟州島之後,還特意向他詢問濟州島的情況。由此,我們能夠理解歷史上文化交流的廣泛性以及中國人對高麗人的關心。